유럽 기업인들 '메이드 인 유럽'으로 뭉친다
  • 파리·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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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전자박람회·에어쇼 현장 취재/각국 기업연합 통한 신제품 개발 성과 돋보여
유럽을 침체된 대륙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프랑스를 패션과 예술, 나폴레옹과 에펠탑의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유럽연합(EU) 창설에 가장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프랑스만 보더라도 그런 판단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첨단기술 경쟁에서 미국과 일본을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박람회가 두 가지 열렸다. 12일부터 16일까지 샤를 드골 공항 근처의 노르 빌레팡트에서 열린 ‘인터트로닉 95’와, 11일에서 18일까지 파리 근교 르부르제 공항에서 열린 ‘파리 에어쇼’가 그것이다.

인터트로닉 95는 유럽 최대의 전자 박람회다. 해마다 프랑스와 독일이 번갈아 열던 전자부품 견본 시장인 `‘일렉트로닉스’(독일에서는 ‘일렉트로니카’)가 확대되어 `‘인터트로닉’으로 거듭났다. 이 박람회의 전시 품목은 전자산업과 관련한 부품과 기계를 망라한다.

파리 에어쇼는 세계 각국 정부가 파견한 바이어들이 몰려드는 대형 항공우주 박람회로 2년마다 열린다. 올해 행사에는 93년 에어쇼에 불참했던 미국 군용 항공기와 헬리콥터까지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93년에는 미국 국방부가 산업 스파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여러 해 동안 파리 에어쇼의 스타 같은 존재이던 군용기와 헬리콥터를 참가시키지 않았다.

“유럽 기업끼리 힘 합쳐 유럽 시장 지키자”

유럽이 첨단기술 경쟁에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두 분야, 즉 전자산업과 항공우주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들인 두 박람회는 풍성한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미 현실로 다가온 유럽통합의 현장을 제대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유럽통합을 한낱 정치 구호 정도로만 여겨온 비유럽인들에게는 인상적이다. 두 박람회에서는, 유럽 각국의 중소업체들이 공동 개발한 전자부품에서 유럽 4개국 항공업체들이 공동으로 생산한 전투기 `‘유로파이터 2000’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 기업들이 연합해서 내놓은 다양한 제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통합된 유럽 시장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유럽 업체끼리 뭉치지 않을 수 없다.” 인터트로닉스 95의 대회장인 장 클로드 바슈씨의 말이다. “전자산업의 경우만 보더라도 유럽 업체들의 실제 생산량이 유럽 시장의 수요에 못미치고 있으니까, 그만큼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통합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유럽 각국 기업들의 연합은 그 형태·수준·배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요즘 널리 쓰이는 전략적 제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하지가 않다. `‘반도체·정보통신·자동차산업과 같은 첨단 부문에서 일류 기업들 간에 이루어지는 제휴’를 가리키는 전략적인 제휴라는 말만 가지고는 오랜 기간에 걸친 유럽 기업들 간의 연합을 제대로 묘사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대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영세업체끼리도 서로 뭉치고 있다. 또 그 방법도 판로 개척을 위한 공동 보조에서 완전히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JEMI·프랑스’, 영세업체 연합 새 모델 제시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한가지, 모두 ‘`메이드 인 유럽’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 방송의 상당수 상업광고에서는 원산지 표시를 메이드 인 유럽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텔레마케팅 제품의 경우 유럽 각국의 주문처 전화번호와 각국 통화로 환산된 정가가 모두 표시된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산업 수준을 따라잡겠다는 취지로 유럽 기업들이 89년에 시작한 반도체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인 JESSI와 이 프로젝트의 프랑스측 대표 격인 JEMI·프랑스는 중소업체들이 느슨한 형태로 이룬 연합이다. JESSI는 `‘이대로 있다가는 유럽이 전자산업에서 제3 세계로 전락한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현재 정부와 민간 부문이 절반씩 부담해 매년 5억7천만달러(약 4천6백억원)에 이르는 공동 연구개발비를 마련한다.

프랑스의 영세한 첨단전자 관련 업체 협의체인 JEMI-프랑스는 기업연합의 새로운 모델이 될 만하다. 이 협의체는 설립되자마자 30여 개에 이르는 회원사들의 판로를 공동으로 개척해 큰 성과를 올렸다. 앞으로 회원사들은 공동 판촉 외에도 디자인 공동 개발, 공동 생산 등으로 협력 수준을 높여 나갈 계획이다. JEMI-프랑스의 대표인 자크 페로슈씨는 주요 회원사 경영진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우리의 협력 모델은 세계 언론으로부터 프랑스식 혁신의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자부한다.

에어쇼에서 몸체와 기능 일부를 선보인 유로파이터도 메이드 인 유럽이다. 유럽 4개국 항공기 제작업체들이 이 전투기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88년 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 업체들이 만든 컨소시엄인 유로파이터와 유로제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의 유럽전투기관리기구와 유로파이터 2000을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금세기 말까지 전투기를 대체해야만 하는 이들 네 나라가 각국의 기술력과 자금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

공동 판매와 공동 개발을 위한 연합 외에 아예 비슷한 회사들끼리 합병하거나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도 유럽식 기업연합의 한 전형이다. 이번 파리 에어쇼에 따로 전시장을 마련한 프랑스의 양대 항공기 제조업체인 아에로스파시알사와 다소항공사는 93년 사실상 합병에 합의한 바 있다. 유럽 상업용 항공기 컨소시엄인 에어버스사의 대주주인 아에로스파시알사와 미라주 전투기로 유명한 다소항공사는 90년대 이후 항공기 제조업계의 불황으로 항공기 수주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두 기업은 통합 후에도 기존의 기업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연구개발과 전략, 상품 정책을 협의할 연구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특히 `‘페르메스트’로 알려진 유럽 우주선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해 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회사가 공동으로 세운 반도체 회사인 SGS·톰슨사도 유럽 기업끼리의 성공적인 연합 사례로 뽑힐 만하다. 87년 설립된 이 회사는 10년이 채 안돼 세계 유수의 반도체 제조업체로 떠올랐다(64쪽 기사 참조).

규모가 큰 유럽 기업들 간의 연합이 늘 바람직한 결과만 낳았던 것은 아니다. JESSI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JESSI 담당자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97년이면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이 중단된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 못지 않게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더욱이 SGS·톰슨사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3개의 대규모 합병은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럽연합 주요국이 망라돼 구성된 상업용 항공기 컨소시엄인 에어버스는, 유럽 각국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잉사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그러나 에어버스사는 이번 에어쇼에서 30대분 판매 계약을 맺어 숨통이 트일 전망이라고 밝혔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화한 유럽 풀뿌리들(기업들) 간의 합종연횡은 유럽 대통합이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실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랑스의 이름난 두 박람회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결론은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메이드 인 유럽 제품의 질과 가격에 그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유럽과 그 심장부인 프랑스의 피상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결정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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