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경악시킨 ‘처녀 청소’ 살인극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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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부인, 소녀·처녀 12명 성폭행후 살해 혐의…영국판 ‘세기의 재판’ 장기화
O.J. 심슨이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고 자유인이 되어 로스앤젤레스 법정을 걸어나가던 날, 대서양 건너 영국 땅에서는 또 하나의 영국판 ‘세기의 재판’이 막을 올렸다.

10월3일 영국 중남부 윈체스터 시 형사법정 피고석에 얼굴을 드러낸 이 ‘세기의 범죄’ 주인공은 올해 41세인 주부 로즈마리 웨스트. 자녀를 여덟이나 둔 그는 공포 영화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얼굴로 영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죄명을 들춰 보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놀랍다. 자신의 친딸과 의붓딸을 포함한 10대 소녀와 20대 처녀 10여 명을 남편과 함께 성폭행하고 강간한 후 무참히 살해해서 집안에 암매장한 혐의가 그것이다. 피고인 로즈마리는 체포된 후 일관되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만일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공범자인 남편 프레드릭 웨스트와 함께 영국 범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부부로 기억될 것이다.
“친딸도 살해” 자백 후 남편은 자살

이번 사건에 대한 확정 판결은 해를 넘길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희대의 범죄와 세기의 재판을 취재하러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는 심슨 재판이 끝난 이후 더욱 가열되고 있다. 또 웨스트 부부의 거주지였던 영국 중부 글로체스터시의 크롬웰가 25번지는 매장된 시체의 유골 9구가 차례로 발굴되면서 ‘공포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

당초 이 세기의 범죄는 웨스트 부부가 87년에 딸이 행방불명됐다고 신고한 후, 의심을 품은 경찰이 끈질기게 프레드릭을 유도 심문한 끝에 그가 딸 살해와 암매장 사실을 자백하면서 사건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지난해 2월26일 웨스트 부부의 친딸인 헤더양(16) 유골을 크롬웰가 25번지 뒤뜰에서 처음 발굴한 이래 1년 동안 현장을 정밀 수색하고 발굴된 유골을 분석해 다른 피해자들의 신원을 일반에 공개했다. 크롬웰가 범죄 현장 외에도 두 군데에서 3명의 유골이 더 발견돼 모두 12명이 살해된 것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다. 수사와 발굴이 진행되면서 피해자의 유골이 아마도 100여 구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해, 경찰은 범죄 수사 사상 가장 많은 인원과 장비를 들여 지난 9월 말까지 끈질기고 지루한 탐문 수사와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따라서 검찰이 충분한 증거와 증인을 확보해 피고인에 대한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는 심리 공판은 다소 늦어져 지난 10월3일에야 배심원 입회 하에 검찰측 인정 신문과 증인 심문이 시작됐다. 지난 2주일 동안 검찰측은 이 사건의 장본인이며 아내 로즈마리의 공범 여부를 알아낼 결정적인 열쇠를 갖고 있는 그의 남편 프레드릭이 사망한 불리한 상황에서, 로즈마리가 스스로 남편의 범죄에 가담한 공동정범이라는 법률상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추한 죄악을 드러내기 전에 자살한 프레드릭(53)은, 아마 25년 동안 고락을 같이한 아내 로즈마리를 살릴 수도 있다는 한가닥 부부애 때문에 공범 여부를 끝내 밝히지 않은 채 영원히 입을 다무는 길을 택한 것으로 일부 타블로이브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또 피고인측 변호인이 이미 주장한 대로 어린 소녀 시절 12세 연상의 변태성욕자인 프레드릭의 마수에 걸려든 로즈마리가 처음부터 거부와 탈출이 허용되지 않는 가장 비참한 첫 희생자였다는 것이 입증될 경우, 프레드릭은 자신의 죽음으로 아내를 구한 열부(烈夫)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같은 우려는 지난 2주 동안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레베손 검사의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웨스트 부부가 소녀와 처녀 12명을 살해해 그 시체를 매장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의 핵심은 성도착증에 걸린 이들 부부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검찰측에 따르면, 근친 상간과 레스비언 등 변태성욕자로 알려진 웨스트 부부는, 그들의 쾌락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지난 25년 동안 어린 소녀들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이용해 왔다. 웨스트 부부는 그들이 서로 만난 71년부터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를 배회하거나 가출한 소녀들은 물론 여행길에 나선 스위스 국적 여대생까지 유인하거나 강제 납치해 자신들의 집에서 성폭행하고 강간한 뒤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살해해 암매장한 것으로 검찰은 밝히고 있다.
영국 사회의 치부 드러낸 잔혹 범죄

15~22세인 피해자들은 프레드릭이 길거리에서 차로 유인할 때 안심하고 차에 탔는데, 이는 차안에 있던 로즈마리 때문이었다. 성적 폭행과 강간을 당한 후 살아 남은 피해자 가운데 한 증인은 20년 전 글로체스터 시 거리에서 당시 21세이던 로즈마리가 웃는 얼굴로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두려움 없이 그들의 차에 올라타 크롬웰가 25번지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아직 공판정에서 로즈마리에 대한 검찰의 직접 피고 신문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시민은 크롬웰가 25번지가 지난해 2월까지 25년 동안 두 사람의 성적 쾌락을 위한 향연장이자 사창굴이었다고 본다. 또 이곳은 연약한 소녀들과 20대 초반 처녀들이 살해 당해 암매장된 살육의 현장이자 그들의 묘지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웨스트가 자살하여 아내의 공모 여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성도착증에 빠진 로즈마리의 성폭행 행위와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해 피해자들을 부부가 살해했을 것이라는 검찰측의 주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레드릭의 전처 소생인 안네 데이브 여인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프레드릭의 전처 소생 두 딸 가운데 막내인 안네는 자신이 친아버지인 프레드릭으로부터 여덟 살 때부터 섹스를 강요 당해 7년 동안 근친 상간을 계속했고, 이것은 바로 의붓어머니인 로즈마리의 용인과 부추김에 의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의붓딸을 레스비언 상대로 이용한 로즈마리의 이상 성격은, 지난 71년 반항아 기질을 가진 또 하나의 의붓딸을 살해했을 것으로 보는 검찰의 주장에 결정적인 보강 증거가 되고 있다.

이 달 초부터 시작된 공판 심리 과정이 텔레비전과 신문에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영국 국민들은 인간 범죄의 잔혹성, 범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와 성도착 증세에 경악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출 소녀들을 찾지 않는 부모의 무관심, 사회복지 당국과 경찰의 비효율성 및 미아 정책의 허점 등 영국 사회의 어두운 치부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혼율 증가로 인한 결손 가정의 증가 속에 부모 자식 간의 애정과 유대 관계가 느슨해지는가 하면, 문제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복지단체의 관심 역시 사회가 다원화·분열화하면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더 타임스>는 극악무도함·흉폭성·야만성이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일부분일 수도 있음을 이 사건이 깨닫게 해주고 있다고 논평하였다.

공판정에서는 아직 로즈마리 웨스트의 직접 발언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심슨처럼 백만장자 유명 연예인도 아니어서 그가 고용한 ‘환상의 변호인단’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심슨 사건이 던지는 교훈을 염두에 둔 듯 윈체스터 재판정의 주심 판사가 배심원 12명에게 첫 공판 심리 과정에서 당부한 말은 사뭇 의미 심장하다. “여러분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가지고 있을지 모를 선입관과 편견에서 당신들의 양심과 사고를 완전 해방시키기를 바랍니다. 언론에서 읽고 보았을 선정적인 면이 결코 당신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을 명쾌한 방법으로 당신들의 귀중한 의무를 수행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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