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제 ‘`박람회’ 먹고 큰다
  • 북경·李興煥 특파원 ()
  • 승인 199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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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전람회 1년에 만여 개 열려…외국 기업 ‘대륙 상륙’ 교두보 구실
조립건축용 패널 제작 기계를 생산하는 인천의 日光종합기계에는 지난 5월 초 비상이 걸렸다. 중국에서 패널 제작기 3대를 주문받아 생산 라인을 풀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작기 1대 값이 약 12억원이니 연간 매출액 80억원 규모인 중소기업체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주문량이다.

한국의 중소기업체라면 대부분이 한번쯤 중국 시장의 문을 두드려 본다. 지금도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중소기업체들은 줄을 서 있다. 그러나 투자 기회를 포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설사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살얼음판 걷듯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광종합기계가 비교적 ‘손쉽게’ 중국 시장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람회 참가라는 기회를 제때 포착했기 때문이다.

일광은 중국에 지사를 설치할 처지가 아니었다. 북경에서 한국 중소기업체들을 대상으로 용역 업무를 대행하는 한 업체에 중국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기회가 왔다. 4월 중순 북경전람관에서 국제 건축 도시설비 전람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건축 경기가 한창인 중국에 패널 제작기를 들고 들어갔다. 해볼 만했다. 전람회 규모로 보아 1주일간 참여한다면 최소한 3대는 주문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전시 자료를 꾸려 들고 전람회에 참석한 일광의 윤석규 부장(35)은 “전람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구매자들과 일일이 접촉해서 상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또 예상 외로 중국 구매자들의 반응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95년 5월 합작 형태로 중국에 진출해 광조우(廣州)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에이스 침대의 경우도 중국에서 열리는 전람회를 잘 활용하는 업체 가운데 하나이다.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가능한 한 다 참가한다는 것이 이 회사의 방침이기도 하다. 올해에만도 싱가포르에 이어 광조우와 북경 등 각종 전람회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특히 지난 3월 말에는 중국의 양대 상품 교역회 중 하나인 광조우교역회에 참가해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 전람회·전시회·교역회·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각종 상품 전람회는 대략 만여 개로 추산된다. 각 성(省)과 시, 특정 지역이 주관하는 지역별 종합 전람회에다가 건축·통신·방직·가전제품 등 전문업종 관련 전람회까지 모두 합칠 경우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으리만큼 많은 전람회가 중국 전역에서 거의 매일 열리고 있는 셈이다. 전람회는 특히 3~5월과 9~10월에 집중되어 있어 봄·가을이야말로 전람회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북경에서 1년 동안 열리는 상품 전람회는 약 2백여 개. 전시장 면적 3만㎡ 이상인 대규모 상설 전시관만 해도 국제무역전람관·북경전람관·국제전람중심·농업전람관 등 여러 개이다. 이 전시장들에는 늘 오색 현수막과 애드벌룬이 장식되어 있고, 전람회가 바뀔 때마다 다음 전람회를 준비하는 기간만 빼고는 언제나 기업인과 일반 시민으로 북적거린다. 북경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전람회마다 쫓아다니면서 관람객에게 전단을 나눠주는 이색 직업이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북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람회는 흔히 ‘베이징 페어’라 불리는 북경국제박람회(BIF)이다. 91년 처음 열린 뒤로 격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95년 4월에 3회 대회가 열렸다. 한·중 수교 이전인 91년 첫 박람회에는 한국관이 개설되어 호응을 얻기도 했으나, 베이징 페어의 열기는 갈수록 처음만 못하다는 것이 중국 국내외 기업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람회, 참가비 비싸고 속 빈 강정 많아

삼성·현대·대우 등 북경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체 사무실에는 중국 전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전람회 초청장이 수북이 쌓이곤 한다. 어디에서 무슨 전람회가 언제 열리는지조차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지난 5월 초 한국의 ㄱ기업 북경사무소에는 전국 규모 자동차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권하는 갑작스런 통보가 왔다. 6월 말에 북경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촉박했다. 참가하더라도 얼마나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참가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ㄱ기업은 그 전람회에 기대를 걸지는 않고 있다. 중국 전역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각종 전람회가 문을 열고 있기는 하지만 속 빈 강정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말 북경 국제무역전람관에서 열린 자동차 부품 전시회에 참가한 ㄴ업체의 한 실무자는 중국 전람회 참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일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일단 외국 업체는 참가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업종 관련 고위직 관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참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업체는 오로지 그 목적 때문에 비싼 참가비를 지불하면서 전람회에 참가한다”라고 털어놓았다.

각종 전람회의 전시장 사용비, 이른바 ‘부스’ 값은 외국 업체의 경우 중국 국내 업체의 3배가 넘는 값이 매겨져 있다. 섬유산업이 발달해 방직기계전시회 등이 자주 열리는 상해의 경우 한국의 섬유 관련 업체가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전략 지역이다. 이 지역 전람회에 참가하려면 10평 규모 부스 1개를 4~5일간 쓰는 데 평균 3천달러 이상 지출해야 한다. 전람회를 주최하는 측으로서는 중국 시장을 넘보는 외국 업체들을 상대로 식은 죽 먹기 식의 장사를 하는 것이니 이보다 안전한 수익 사업이 없는 셈이다.

참가비만 비싼 것이 아니다. 워낙 전람회가 남발되다 보니 개막 전에 전시장이 다 차지 않아 개막 하루 이틀 전에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9월 말 한국의 중소기업 대표 ㅎ씨는 상해에서 대규모 전람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참관하기 위해 상해행 비행기를 탔으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전람회는 이미 취소된 뒤라 상담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또한 대부분의 전람회가 이른바 ‘대리 회사’라 불리는 에이전트들이 전람관측과 참가자 사이에 끼여들어 부스를 임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중국 전람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각종 전람회를 주관하는 중국 정부가 이 대리 회사에 주도권을 대폭 넘겨주고 있으며, 대리 회사의 90% 이상은 주로 홍콩계가 장악하고 있다.

상품의 홍보 수단이 제한되어 있는 중국 시장에서는 전람회야말로 상품을 홍보하고 시장에 진출하는 교두보 구실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여 개가 넘는 전람회를 가리켜 개방 중국의 ‘소총수’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양적 팽창 현상과 전람회의 양적 증가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비대한 양적 팽창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음은 물론이다.

중국 시장을 겨냥하는 한국 업체들에게 전람회는 ‘극약’ 같은 존재이다. 적시에 잘 활용하면 기대 이상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생돈만 날리고 말 가능성이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 시장 진출에 관한 한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아직도 후발 주자에 속한다. 한국 상품에 대한 중국 기업인들의 인지도가 낮고, 중국 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인들의 정보 입수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인들은 전람회 참가 기간에 반드시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기업들에게는 광고라는 홍보 수단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중국 전역에서는 전람회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전람회장을 찾는 한국 기업인들의 발길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국제전람중심에서 만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중소기업인은 여행용 옷가방 크기인 조립식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자신이 고안한 전람회 전시용 조립 가방이었다. 가방을 펼치자 높이 1m 남짓한 8첩 병풍으로 변했고, 그 안에는 건축 자재인 타일 10여 종과 각종 홍보 인쇄물 20여 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전람회를 찾아 중국 전역을 혼자 돌아다닌다는 이 기업인은, 중국의 전람회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무시할 수 없는 제2의 시장이라고 말하면서 가방을 다시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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