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 오른 쉰살 공룡, 유엔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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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한 조직·방만한 운영·재정 적자 등 ‘고질병’ 위험 수위…개혁 목소리 높아
세계 1백85개 회원국이 가입할 정도로 커진 유엔이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아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세계 각지에서는 민족·종교 문제가 뒤엉킨 지역 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직은 비능률의 상징으로 지탄 받는다. 그렇다고 이를 개편하기도 쉽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5년 10월 유엔이 탄생했을 때는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었다. 창립 회원국 51개국 대표가 쓸 사무실은 뉴욕 시 브롱크스 대학 캠퍼스 앞에 있는 맨해튼 호텔에 설치되었다. 지금의 유엔본부 건물에 입주한 때가 7년이 지난 52년이었다. 당시는 인원도 적고 모든 것이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모두가 전쟁의 고통이 없는 더 좋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창립 50주년을 맞은 오늘의 유엔은 마치 동맥경화증에 걸린 공룡처럼 기우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엔 50년을 실패로 규정짓기도 한다. 이들은 유엔의 최고 목표인 전쟁 방지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 지난 50년 동안 전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1백50건이나 벌어졌다. 특히 냉전이 종식된 뒤로는 지역 분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도 유엔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인종 분규로 얼룩진 르완다와 소말리아에서의 유엔 활동은 실패 사례로 꼽힌다. 현재 해결 기미를 보이고 있는 옛 유고 내전에서 유엔이 벌이고 있는 평화유지 활동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유엔 전문가들은 유엔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전과 걸프전에서 유엔이 보여준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고, 50년 동안 38개 지역에서 평화유지 활동을 전개한 것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또 유엔이라는 토론의 장이 마련됨으로써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고, 기아·환경·군축·마약 등 범지구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것도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유엔의 50년 공과를 접어두고, 탈냉전을 맞아 유엔이 과거 어느 때보다 달라져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유엔 50주년 기념 총회에 참석한 세계 각국 정상들은 한결같이 유엔의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것은 지금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살아 남지도 못할 것이라는 경고와도 같은 것이다.
회원국마다 개혁 내용에 의견 달라

유엔 개혁 문제는 91년 11월 제6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된 부트로스 갈리 현 총장이 업무의 제1 과제로 내건 것이다. 그후 지금까지 유엔에 보고된 개혁안만도 백 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눈에 띄지 않게 유엔 개혁 작업이 진행돼 왔다.

하지만 유엔의 체질을 바꾸는 본격적인 개혁은 아직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유엔 회원국들의 동상이몽 때문이다. 유엔이 개혁돼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씩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다.

우선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지역에 포진해 있는 저개발 국가 및 개발도상 국가들은 남북 간의 불평등을 개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선·후진국 간의 경제적 격차가 해마다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벌어져왔기 때문에, 냉전이 종식된 뒤에도 남북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또 유엔이 선진국들을 위한 무대 노릇을 해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집트 출신인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지난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 “왜 우리는 소말리아에서는 군대를 철수하면서도 키프러스에서는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 이것은 확실히 인종 차별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에도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유엔 개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어떤가. 미국은 유엔에 먼저 비대해진 몸집을 줄이고 능률을 높이라고 주문한다. 현재 유엔은 사무국 인원만 1만4천명에 달한다. 미국이 주문하는 것은, 현재 유엔이 안고 있는 재정 적자 위기의 해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충고이다. 독일 외무장관 출신으로 유엔 감찰관에 임명된 칼 데오도르 파슈케는 최근 한 보고서에서, 파산 위기에 처한 유엔이 실제로 얼마나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예컨대 보스니아 내전에서 유엔은 제설기를 샀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발전기 1천4백대는 포장도 풀지 않은 채 썩히고 있다. 엄청난 군복이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됐고, 어떤 보험회사에 50만달러를 과다 지불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소말리아 평화유지군은 현금 3백90만달러를 도둑맞기까지 했다. 이처럼 방만하고 어설픈 운영 때문에 유엔은 지난해에 1천6백만달러나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유엔이 이처럼 방만하게 운영되는 이유는, 유엔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견제할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유엔의 관료 기구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데다 너무 경직되게 운영돼 개인의 창의성을 꺾기 일쑤다. 그리고 유엔 직원들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최근 들어 유엔의 이같은 고질병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고, 똑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들이 통합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효과는 미미하다. 유엔 회원국 간에 개혁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분담금 12억5천만달러 체납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인원을 감축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고 실토했다. 그는 “4년 전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래 고위직의 3분의 1 정도를 감축했다. 그러자 유엔 회원국들이 새로운 직책을 몇 개 신설했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도주의문제 담당 사무차장·고등인권판무관·감찰관 직이다.

불필요한 조직을 없애는 작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탁통치이사회다. 이 기구는 지난해 팔라우가 마지막으로 독립해 유엔 회원국이 됨으로써, 신탁통치를 실시할 대상 지역이 없어졌다. 이에 갈리 사무총장은 신탁통치이사회를 없애라고 두 번이나 총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지금도 끄떡없이 존속하고 있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올해 유엔 총회 의장을 맡은 디오고 프레이타스 도 아마랄은 신탁통치이사회를 폐지하기 위해 재차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엔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돈문제다. 모든 유엔 회원국들은 유엔 분담금을 0.01~25%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한국은 0.80%로 17위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전체 1백85 나라 가운데 분담금을 제대로 납부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50개국 정도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1백 35개국은 체납액이 밀려 있는 상태다.

특히 미국의 분담금 체납은 유엔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현재 유엔이 회원국들로부터 받아야 할 체납 총액은 30억 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미국의 체납액은 전체의 40%가 넘는 12억5천만달러나 된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5%와 평화유지 활동비의 31%를 내도록 되어 있다. 올해 유엔의 정규 예산은 13억달러이고, 평화유지 활동비는 31억달러이다. 평화유지비를 포함해 올해 미국이 부담해야 할 액수는 15억달러이다.

그런데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이후 분담금 납입이 늦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 상원은 평화유지 활동비 분담률을 25%로 낮추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제시 헬름스 상원 외교위원장은 분담금 납부가 미국의 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분담금 납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영국·프랑스 등 미국의 선진 우방 국가들은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영국 외무장관 마이클 리프킨은 ‘세금 없이 대표 없다’는 2백년 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얘기를 들먹이며, 미국이 2년간 분담금을 내지 않을 경우 이라크처럼 유엔 투표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밖에 프랑스·독일·캐나다도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갈리 사무총장은 심각한 유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년 초 특별 유엔 총회를 열 것을 검토하고 있다. 예산 적자를 줄이고 세계은행 차관을 도입하거나 채권을 발행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이밖에도 기능이 축소된 경제사회이사회를 개편하는 문제와, 안전보장이사회를 확대하는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안보리 확대 문제는 유엔 개혁의 핵심 사안으로서, ‘대표성’과 ‘효율성’원칙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71쪽 기사 참조). 유엔은 지난해부터 1년간 이 문제를 위한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 논의했지만, 합의를 끌어낼 때까지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결국 유엔 회원국 간의 합의 부재가 유엔 개혁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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