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통치구호 “사랑과 평화”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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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 이미지 털어내기’ 정책 확정 단계… 대남 강경책은 계속될 듯
김정일 시대를 상징할 북한의 새로운 정책 슬로건이 지도부의 내부 토론을 거쳐 확정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의 한 북한 정보 소식통은 “지난 3월부터 노동당 고위층을 중심으로 한 당내 토론을 거쳐 최근 새로운 슬로건이 공식 당 정책으로 확정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또한 안기부 등 정부내 관계 부처도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안기부나 국내 정보 소식통들이 파악한 김정일 시대의 새로운 정책 슬로건은 ‘자애와 사랑’이라는 두 낱말로 요약된다. 즉, 김일성 시대를 상징한 것이 주체사상이었다면 김정일 시대는 자애와 사랑에 기초해 대내외 정책을 펴 가겠다는 것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자애와 사랑이라는 말 가운데 자애는 영문으로 ‘PEACE’라고 표기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즉, 대내적으로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자애와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 대외적으로 사용할 때는 ‘평화와 사랑’이라고 표현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자애와 사랑이든 평화와 사랑이든 북한이 그동안 형성해온 이미지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호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최근 우성호 송환 거부와 무장 간첩 침투 등 호전적인 대남 행동을 볼 때 이러한 정책 슬로건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안기부를 비롯해 현재 대북정책 담당자들이 북한 지도부 내에서 토론을 거듭하면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이 새로운 정책 슬로건이 앞으로 대내외 정책으로 파급될 때 어떤 상황이 조성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새로운 정책 슬로건은 대외 정책 면에서 대단히 교묘한 형태로 작용할 것으로 보여 그렇지 않아도 외교력에서 열세를 보이는 우리 정부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북한이 김정일 시대를 위한 새로운 정책 슬로건을 개발하는 데 착수했다는 사실이 국내 정보 소식통들 사이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부터였다. 이 때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은 중앙이나 지방의 당 간부들로부터 북한이 뭔가 새로운 정책 기조 아래서 김정일 시대를 준비해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자애와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은 올해 3,4월께였다. 여러 방문객들로부터 이같은 말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자애와 사랑이 북한의 대내외 정책으로 구체화할 것인지는 불투명했다.

그러던 중 이것이 김정일 시대의 새로운 대내외 정책 슬로건으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것은 안기부였다. 안기부가 이에 대해 확신하게 된 것은 지난 8월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한 인사가 북한의 고위 당국자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자애와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해나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9월 들어서는 북한 안팎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포착되기 시작해, 이 때부터 국내 정보 소식통들은 북한이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정책 기조 아래 움직인다고 판단하게 됐다고 한다. 이 때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9월 말 북경에서 있었던 나진·선봉 투자 설명회가 거론된다. 이 설명회에서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개막식과 폐막식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 내용 가운데 김일성에 대한 언급이 두 군데밖에 없고, 또 주체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등 매우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30,40대 개방파가 북한 이끌어

일반적으로 북한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해 대외에 공개하기까지 다음과 같은 네 단계를 거친다. 새로운 정책을 당 비서국 산하 당 사상연구팀이 입안하면 먼저 당 고위 직을 중심으로 토론을 거치고, 그 다음에는 당의 사업 부문 요원들, 그후 당·정·군 실무 담당자들까지 토론이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인민 대중에게 확산되는 과정을 밟는다. 따라서 하나의 정책이 입안돼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1년~1년6개월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92년 발표된 신무역체제 같은 경우 1년6개월 걸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례로 볼 때 자애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정책 슬로건은 현재 노동당 고위 직을 중심으로 한 1단계 토론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보 소식통들은 그 과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당 사상연구팀을 중심으로 한 정책입안팀이 작업에 착수한 것이 지난해 11월께였다. 그리고 올해 3월께 자애와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김정일의 지시로 당 고위층을 중심으로 한 토론이 전개됐다. 1단계 토론에 걸리는 시간은 6개월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8,9월쯤에 토론이 끝나고 확정 단계에 들어갔을 것이다. 최근 안기부는 그 동안의 당 고위층 토론 과정에서 이 슬로건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긍정적으로 내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앞으로 올해 안에 당 사업 부문을 대상으로 한 2차 토론이 전개되고, 내년 초쯤 당·정·군 일반 요원을 대상으로 한 3차 토론과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4차 토론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바로 이 3차와 4차 토론이 전개되는 시점과 김정일의 전면 등장이 맞물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자애와 사랑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하는 것은 김정일 시대의 등장을 가늠케 할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왜 자애와 사랑인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애는 뭐고 사랑은 뭔가. 이 문제를 따지기 전에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정일과 그 주변 참모들의 현실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김정일이 추진하는 대내외 정책의 실무 중심을 맡은 세력은 30대와 4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재미 교포 고정숙씨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당과 정부의 각 부문에 박혀 있는 30대와 40대들이다. 이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개방적이다”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견해는 다른 북한 방문자들로부터도 확인된다. 이들은 그 전 세대가 이데올로기 관점으로만 북한의 미래를 바라본 데 비해, 탈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국익 중심주의에 따른 합리적 사고 방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90년대 이후 북한을 둘러싼 주변 정세 변화를 매우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부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을 둘러싼 주변 정세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냉전은 끝났다’는 것이다. 즉, 91년의 한·소 수교, 92년의 한·중 수교라는 뼈아픈 외교적 패배를 겪으면서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중심으로 변해가는 주변 질서의 냉혹한 흐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 당 이론지 <근로자>나 조총련계 이론가들의 논의가 냉전 이후의 국제 질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북한이 92년 신무역체제를 발표한 것도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 우선주의로 치닫는 주변 환경에 적극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탈냉전 인식은 냉전의 상징인 김일성 주석의 존재 때문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김주석이 사망했을 때, 그로 대표되던 냉전 시대의 종언에 대해 남쪽 당국자들보다 김정일과 그 주변 인물들이 오히려 더 실감나게 인식했으리라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지난해부터 북한 고위층이 즐겨 사용했다는 ‘새로운 시대’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 주변의 정책 개발팀은 냉전 시대에 북한을 상징하던 주체사상에서 벗어나, 탈냉전 시대에 북한의 대외 이미지를 유연하고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탈이념적인 새로운 정책 슬로건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와 대화 안한다”

그러나 대내적인 측면에서는 김정일이 김일성 시대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일성에 대한 부정은 결국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현재 북한 주민들의 삶을 질곡으로 몰아넣는 식량난이나 경제난은 한순간의 경제 정책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다.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고, 그 동안 북한 주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공동체적 감성에 기초한 정서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자애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은 정책팀의 이러한 감각과 현실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자애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말이나 북한에서는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 동지’ 등으로 매우 익숙하게 사용해온 말이다. 이는 결국 김일성을 계승해 인민을 자애롭게 대할 사람은 김정일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대외적으로는 ‘평화와 사랑(PEACE AND LOVE)’ 정도로 번역해 대외 관계에서 그 동안의 호전적이고 강경한 이미지를 벗어나 부드럽고 평화를 애호하는 듯한 이미지를 강조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미 북한이 새로운 정책 슬로건에 따른 대외 정책 조정에 착수한 것으로 본다. 특히 지난 5월 말 김정일이 주도한 당 비밀 회의의 결정 사항은 이러한 새로운 정책 슬로건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지적된다. 당시 비밀 회의 결정 사항이 상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안기부 등에 의해 이런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또 이 회의에서 북한의 대외 정책 윤곽이 결정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첫 해결 과제로 하고, 한국과의 관계는 미·일과의 관계 이후로 미룬다는 내용이다. 최근 한양대 중소연구소가 주최한 한·러 포럼에 참석한 발레리 데니소프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1국 부국장 역시 똑같은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비공식 발표문에서 “북한은 미국·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이뤄 한국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뒤 남북대화에 응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북한 지도부는 현재의 한국 정권과는 접촉하지 않고 97년 대통령 선거를 기다렸다가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최근 북한이 보인 미국이나 일본과의 협상 태도가 그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그 이전보다 매우 협조적이고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경수로 회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난항을 보일 것이라는 일부 예측과 달리 북한측의 적극적인 태도로 상당히 빠른 진척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연락사무소를 둘러싼 협상에서 북한측이 보여주고 있는 적극적인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11월까지 모두 매듭짓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이처럼 대외 관계에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새로운 정책 슬로건에 따라 협상의 가이드 라인 자체를 낮추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같은 북한의 새로운 정책 슬로건과, 그것이 앞으로 구체화할 새로운 정책 방향이 우리 정부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대남 정책에서 대단히 차별적인 모습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앞으로 상당 기간 북한이 대외적으로는 유화책을 쓰면서 대남 정책에서는 강경책을 계속 유지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는 대응책 마련이 상당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쌀협상을 계기로 미국과의 한·미 공조가 내용적으로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부의 대응책 마련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최선의 대북 정책은 ‘조용히 기다리기’

사실 핵문제가 제기된 이후 3년 여에 걸친 한국의 대북 정책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력에 의존한다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제는 대북 정책에 관한 한 한국과 미국은 같은 입장이라는 가정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난번 쌀회담 과정에서 한국이 북한의 강경한 태도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미국은 연락사무소 협상에 박차를 가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연락사무소와 남북대화를 연계한다는 한국 정부의 구상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그동안 북한과의 협상을 전면에서 이끈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과의 협상에서 특별 사찰은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연락사무소는 남북대화와 연계돼 있지 않다’는 등 일련의 폭탄 선언을 계속해 우리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내 대북 전문가들 중에는 지난 8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이나, 공로명 외무부장관의 갑작스런 대북 인권 공세 등은 한·미 공조라는 유일한 대북 정책 수단을 사실상 상실한 상황에서 강경책 이외에는 별다른 정책 수단이 없는 한국 정부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때 강경책의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는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등 주변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견해도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그러나 이런 강경 일변도 대응은 한계가 있다. 게다가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현재까지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과의 협조 체제 자체를 무너뜨릴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 북한의 새로운 정책 노선이 구체화돼 북한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우리 정부의 강경 이미지가 대비될 경우 외교 입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은 그동안의 대북 정책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새로운 정책 노선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합리적인 대북 정책을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북한과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는 북한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우리 정부와 대화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여태까지처럼 북한 내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 입장만을 내세운 대화 요구 등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북한이 자기들의 프로그램대로 대내외 정책을 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대응책이 되리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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