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할로란 칼럼/ 한·일 순방 클린턴 “미국을 믿어주세요”
  • 정리·卞昌燮 기자 ()
  • 승인 1996.05.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일본 방문길에 동북아 안보 연대 강조, 11월 대선 노려
최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신뢰를 얻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미국을 보는 아시아 국가들의 회의감은 여전한 듯하다.

지난 3월 중국과 대만의 양안 위기 때 클린턴이 보여준 외교력은 절묘했다. 그의 외교력은 절도를 보이면서도 항공모함 2척을 대만 인근 해협으로 급파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와 동시해 그의 외교팀은 만일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응전에 직면하리라는 점을 북경 당국에 분명히 전달했다. 결국 중국도 체면을 차리는 선에서 무력 시위를 중단하고 물러설 수 있었다.

최근 제주도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과 맺은 미국의 공약을 강한 어조로 강조했다.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가하는 4자 회담을 제안했다. 이 회담이 성사될 경우 남북한이 주도하고 미국과 중국은 보조 역할을 맡도록 한다는 것이 그의 복안이다.

일본을 찾은 클린턴은 얼마 전 오키나와 주둔 미군 병사들의 일본 여학생 성폭행 사건으로 고조된 미·일 관계를 풀고자 했다. 그는 오카나와 수도인 나하의 중심부에 위치한 미군 기지를 외곽으로 옮기고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쳐온 미군 훈련도 줄이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미군의 평화 유지 임무와 훈련에 필요한 병참 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아시아의 강국으로 남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는 점이다. 그는 도쿄에서 “이 지역 일부 나라들이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는 한 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이번 아시아 순방을 통해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 특히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그에게 아시아 순방 성과는 유권자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미국에 대해 품고 있는 근원적인 회의는 여전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외교 정책이 성공했다고 해서 표를 얻지는 못한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걸프전 때 동맹군과 함께 이라크군을 섬멸하여 인기를 모았지만 1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국내 경제 및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패했다.
4자 회담서 러시아·일본은 왜 제외됐나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씨는 외교 정책을 배관 작업에 비유했다. 이를테면 상수도에 이상이 없으면 미국인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관이 새거나 변기가 막히면 사정은 달라진다. 눈에 안 보이는 외교 정책보다 고장난 수도관이나 변기처럼 피부에 와닿는 것이 국민의 관심을 우선 끌게 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클린턴의 성공적인 방한·방일 성과와 절묘한 대만 외교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중·대만 문제와 관련해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최근 헤이그에서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을 만나본 결과 진짜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중국군은 대만 해협에서 철수했으나 대만의 장래에 관한 문제는 위기가 발생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확실하다. 전부장은 대만이 독립을 선포할 경우 중국이 즉각 침공할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천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방한해 제시한 4자 회담안은 이미 수년 전부터 구상되어 왔다. 한국과 미국이 이 회담을 성사시킬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제안을 공개적으로 내놓기 전에 중국과 북한측에 미리 회담 내용을 설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처음에 중국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런 사전 작업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전부장은 4자 회담이 합리적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당사자, 특히 직접 당사자인 남북한이 합의를 봐야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또한 중국이 4자 회담에 대한 북한의 주도적 입장을 뒤따를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북한은 중앙통신을 통해‘미국은 남한 괴뢰 정권과 밀착해 전쟁 미치광이들을 부추켜서는 안된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에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있은 직후 평양 당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뒤 최근엔 그런 제의가 검토할 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이 4자 회담을 수용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없다. 4자 회담과 관련해 궁금한 것은, 한반도에 이해가 걸려 있는 러시아와 일본이 왜 4자 회담 참여 대상국에서 제외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클린턴의 방일도 성과가 컸다. 미국은 일부 기지 패쇄와 함께 오키나와 중심부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를 앞으로 5~7년에 걸쳐 오키나와 주민에게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과연 전투기 백대와 군인·군속 4천명이 있는 이 기지를 폐쇄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릴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는 정치적 타협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용인가. 그 대답이 어떻든 간에 기지 폐쇄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에 대한 일본인의 반미 감정이 사그러든 것은 아니다.

마사시데 오타 오키나와 지사도 기지 폐쇄가 문제 해결의 첫 단추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한 일본인 텔레비전 해설가는 “최근 일본에서 일고 있는 강한 민족주의 성향에 비추어볼 때 일본 땅에 거대한 미군 기지를 계속 유지하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해 아시아인 회의감 여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앞으로도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을 계속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꼼꼼히 살펴보면 미국에 대한 일본의 지지는 어디까지나 미군의 평화유지 업무나 훈련에 국한할 것임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시모토의 발언이 알려지자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 좌파와 주화론자(主和論者)들은 그의 발언이 일본을 재무장하는 방향으로 끌고가려는 속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똑같은 우려는 한국·중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로부터도 제기되었다. 모두가 한때 일본의 침탈을 겪은 나라들이다.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만일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안보 동맹을 확대할 경우 더 큰 문제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클린턴이 일본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확실하게 내놓을 수 없었던 질문은, 만일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거나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때 미국은 일본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일 무역 마찰 문제는 양국 정상회담이 안보 문제에 관한 토의에 비중을 둔 나머지 논의되지 않았다. 무역 마찰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기보다는 우선은 느슨해져가고 있는 양국의 안보 동맹을 강화해야 하겠다는 쪽으로 양국의 인식이 일치했던 것 같다. 만일 통상 문제를 정상 회담의 본 의제로 올렸을 경우 양국의 불협화음이 드러났을 것이 뻔하다. 아다시피 하시모토 총리는 과거 미국의 미키 캔터 무역대표부를 상대로 씨름한 적이 있는 노련한 통상 협상가 출신이다.

결론적으로 클린턴의 아시아 순방이 남긴 교훈은, 아시아가 미국을 신뢰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중심의 미국 외교 정책에 환멸을 느껴온 아시아인들의 근본적인 회의감은 앞으로도 쉽사리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