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망한 전 CIA 국장 윌리엄 콜비 인터뷰“정보기관도 법을 벗어날 수 없다”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5.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사망한 전 CIA 국장 윌리엄 콜비와의 미공개 단독 인터뷰
73~76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윌리엄 콜비(76)는 냉전의 주역이었으면서도 늘 그 사실을 불만스러워하던 사람이었다(상자 기사 참조). 지난해 10월 8∼10일 서울에서 열린 ‘탈냉전, 민주화 그리고 국가 정보’라는 국제 학술대회(국가정보연구회 주최)에서는 <민주제도와 국가 정보 미국의 경험>이라는 논문을 통해 민주 제도에서의 바람직한 국가 정보기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사저널>은 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방한했던 그와의 비공개 인터뷰를 요약·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지난해 10월10일 힐튼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부의장 출신으로 냉전 시대에 그의 라이벌이었으며, 현재도 해외정보서비스(FIS·KGB의 후신) 고문으로 있는 바딤 키르피첸코 장군(77)이 자리를 같이해 말을 거들었다.

한국에 몇번이나 와 보았는가?

극동지부에서 근무할 때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70년대 초에도 일본 도쿄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거의 와보지 못했다.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80년대 후반 미국 언론들은 시위 군중으로 뒤덮인 서울 시내의 표정을 연일 보도했다. 80년 광주사태 당시와 비교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두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80년 사태 때에는 군이 투입됐고, 87년에는 경찰이 투입됐다. 군은 진압해야 될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는 집단이고, 경찰은 가능하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집단이다. 나는 비록 느리고 더뎌 보이지만 이것이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시위로 1명(연세대 이한열군을 지칭하는 듯)이 사망했는데, 최소한 수백명이 사망한 광주사태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나.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 국민들은 점진적으로 정치 발전을 쟁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극동 지부장 시절에 행한 한국 관련 공작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가?

비록 본격적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미묘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국 내에서 7사단 철수 문제가 막 거론되기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극동지부장에서 국장으로 임명돼 워싱턴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 문제에 골몰했었다. 가능하면 양국이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랐다.

지금 한국에선 김일성 사후 북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재직 때도 그랬지만, 북한은 정보 수집 활동을 펴기에 세계에서 가장 힘든 곳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무엇보다도 HUMINT(Human Intelligence·인적 정보)가 스며들 여지가 전혀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첩보 위성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서 북한의 동향을 파악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북한 문제에 관해서라면 (키르피첸코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적격이 아닌가.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내가 자신있게 얘기해줄 수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지금까지 권력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발언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엄청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도 있다.

정보 활동을 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북한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한국의 국가 정보기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현직에서 떠난 나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다. 그러나 한국은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 사후에도 한국 언론이 국가 정보기구의 능력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낸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때 키르피첸코가 거들고 나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북한 고급 정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러시아가 한국과 가까워지면서 북한은 우리를 멀리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북한 정보에 관한 한 우리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북한 정보에 관한 한 한국의 안기부가 가장 앞선 정보기구일 것이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러시아와 한국의 정보기구 간에는 서로 사람을 파견할 정도로 교류를 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CIA 국장 치고 이례적인 행적 때문에 당신은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는 평인데.

논문을 통해서도 발표했지만 미국의 정보기구는 네 차례 변혁을 겪었다. 42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윌리엄 도노반 장군이 전략사무국(OSS)을 창설한 것이 첫번째 변혁이었다면 U2기(고공 정찰기) 같은 첨단 기술을 정보 수집 활동에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 변혁은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정보기구에 대해 그 역할을 민주적인 법과 제도의 틀 속에서 수행하도록 제한하면서 비롯됐다. 나는 이 논란의 시기에 국가 정보기구를 이끌면서 법과 제도에 맞춰 바꾸려고 노력했다. 내 행동에 대해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내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냉전이 끝나 적이 사라진 지금은 정보기구의 역할을 다시 모색해야 하는 네 번째 변혁의 와중에 있다.

국가 정보기구에 대한 새로운 법이 제정된 한국의 경우는 당신이 얘기한 세 번째 변혁의 와중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과 제도에 구속된다는 것은 당연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특히 가장 까다로운 적을 아직 그대로 두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초기 단계에서는 국가 정보기구가 반발을 하거나 진통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적인 법 질서와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나중에는 그것이 그들에게도 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