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도지는 '북한 핵' 부스럼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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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개발 의혹 ‘재발’… 경제 제재 완화 등 해결 안되면 제네바 합의 깨질 수도
요즘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 정계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하루가 멀다고 주요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북한의 핵 재개발 의혹 때문이다.

사실 94년 미·북한 제네바 핵 합의를 통해 북한이 기존 핵 시설을 동결한 뒤 한동안 북한 핵 문제는 미국으로서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그같은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북한에 대한 중유 공급이 차질을 빚은 데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 완화 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북한은 이를 제네바 합의 위반이라며 사용후 핵연료봉에 대한 봉인 작업을 중단하는 것은 물론 미사일을 해외에 수출하겠다고 천명하는 등 미국을 상대로 ‘이유 있는’ 시위를 벌여 왔다.

최근 불거진 북한 핵 재개발 의혹은 클린턴 행정부를 그 어느 때보다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국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등 대표적인 언론들은 최근 1면 기사와 칼럼·사설 등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가뜩이나 클린턴 외교팀의 북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화당은 호재를 만나 기세가 등등하다.

‘영변 부근 땅굴 공사’ 보도로 미·북한 갈등 고조

상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간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8월17일자 <뉴욕 타임스>가 북한의 핵 재개발 의혹을 1면에 크게 보도하면서부터였다. 이 신문은 미국 정보 당국이 마련한 비공개 브리핑에 참석했던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영변 동북쪽 40㎞ 산속에 핵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땅굴 공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미국 첩보 위성에 포착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뒤 18일자 <워싱턴 포스트> 역시 1면에 ‘1만5천명의 노동자가 영변 지하 핵 관련 시설 건설 현장에 동원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제네바 합의문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 보수적인 <월 스트리트 저널>도 최근 정통한 의회 소식통을 인용해 ‘영변의 지하 시설 공사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북한 중유 지원 자금과 관련한 하원의 협조는 사실상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고 전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하필 이 시점에 북한 핵 문제가 또다시 불거졌느냐 하는 점이다. 특히 지난 8월21일 뉴욕에서 열린 미국과 북한의 고위급 회담을 불과 닷새 앞둔 시점에서 그같은 정보가 <뉴욕 타임스>에 새어 나간 데는 다분히 미국 정보 당국의 ‘의도’가 깔렸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정보 당국이 그처럼 민감한 비밀 정보를 언론에 흘림으로써 미·북한 고위급 회담을 앞둔 북한에 압박 카드를 꺼내 보였다는 것이다. 워싱턴 소재 민간 정책연구기관인 애틀랜틱 카운슬의 한반도 전문가 고든 플레이크 연구원은 “이번 북한 핵 관련 정보는 미국 정보 당국이 특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이같은 정보 유출이 정보 당국의 고의적인 ‘언론 이용하기’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정보 당국이 ‘비밀 정보가 새어 나가도 오케이’라고 판단했다는 흔적은 있다.

이번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경우 취재원은 근래 북한 핵 문제에 관한 비공개 브리핑에 참석했던 백악관과 국방부의 고위 관리들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원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들 관리 가운데 일부가 정보를 흘린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번 북한 핵 관련 보도의 논조가 한결같이 북한의 핵 재개발 가능성과 그로 인한 제네바 합의 파기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대표적인 강경론자인 공화당의 소니 캘러헌 의원의 말을 인용해 ‘이번 보도가 사실이라면 제네바 합의문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보도했다. 캘러헌 의원의 발언은 그가 하원 세출위원회 산하 대외원조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비중 있는 인사라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끈다. 북한에 대한 중유 지원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제일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소위원회이다.

문제는 북한이다. 북한은 올해 들어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는다며 불만을 나타내 왔다. 이를테면 제네바 합의의 핵심 사항인 경제 제재 해제와 중유 공급, 경수로 건설 따위 문제를 미국이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이같은 항변에 대해 일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경제 제재 문제가 꼽힌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 이듬해인 95년 1월 지극히 상징적인 차원에서 일부 경제 제재 완화 조처를 취했지만 그후 지금까지 별다른 추가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북한 제재 문제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미국은 북한 제재와 관련해 일종의 ‘로드맵(roadmap)’을 갖고 있다. 즉 미국이 현안으로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 북한이 해결 의지를 보일 경우 미국도 제재 해제에 적극성을 띨 수 있다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은 경제 제재 완화를 한국전 당시 미군 실종자 문제나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 등과 연계해 풀고자 한다. 미국은 지난 3월 베를린에서 열린 4자 회담에서 처음으로 이같은 연계 정책을 북한에 제시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이 연계 정책의 고리를 풀지 않는 한 경제 제재 완화 문제는 풀릴 수 없게 되어 있고, 바로 이 점을 북한은 매우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중유 공급 문제만 해도 북한은 ‘정당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제네바 합의대로라면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가 완공되는 오는 2003년까지 북한에 해마다 중유를 50만t씩 공급해야 한다. 물론 미국이 그 비용을 전부 부담하라는 법은 없지만, 국제 사회의 지원을 끌어오든 아니면 자체 재원을 이용하든, 중유가 50만t씩 차질없이 북한에 공급되도록 보장한 당사국이다. 그런데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오는 10월 말까지 끝나야 할 중유 공급이 아직 절반도 채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제는 앞으로 두 달 안에 중유 조달 자금을 수천만 달러 마련해야 하는데 이 일이 미국 내의 정치적인 이유로 무척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북한 핵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행정부의 대북 중유 지원 요청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영변 지하 시설 공사 보도는 그같은 가능성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경수로 건설비 문제가 있다. 경수로 공급 주체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지난 7월에 가까스로 집행이사국 간의 재원 분담 비율을 합의했다. 총 46억 달러 가운데 한국이 70%를 부담하고, 일본이 10억 달러를 내며, 나머지 자금은 미국이 주도해 조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우선 4억 달러로 추정되는 나머지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없다. 게다가 당장 내년부터라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될 경우 과연 어느 나라가 사업 첫해의 경비를 댈지에 대해서도 아직 완전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결국 경수로 건설비 문제는 재원 분담에 합의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문제점투성이인 셈이다. 이런 사정을 북한이 모를 리 없다.

“북한 핵 위협은 단순 공갈 아닌 이유 있는 항의”

따라서 이 세 가지 문제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북한을 자극할 만큼 크게 불거질 경우 북한은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할 ‘명분’을 찾을 수 있는 셈이다. 애틀랜틱 카운슬의 고든 플레이크 연구원은 “북한이 근래 들어 핵연료봉 봉인 작업을 중단하는 등 핵 위협을 벌이고 있는 것을 단순한 공갈이 아닌 정치적 메시지로 보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즉 경제 제재 완화, 경수로 건설 및 중유 공급 문제 가운데 어느 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의 현재 행동은 미·북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협상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실제로 제네바 합의를 무효로 선언하고 지난날처럼 핵을 개발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크지 않은 것 같다. 북한도 제네바 합의를 정권 생존의 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크 연구원은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명시된 미·북한 연락사무소 설치와 궁극적으로 미·북한 대사급 수교를 북한 정권의 안정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북한이 최악의 경우 미국이 제네바 핵 합의 이행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합의문 파기를 공식 선언할 수는 있어도 핵 재개발과 같은 추가 행동은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러나 중유 공급이나 경제 제재 완화 등을 미국이 계속 외면할 경우 북한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제네바 핵 합의 파기와 핵 옵션 선택이라는 외길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럴 경우 미·북한 관계가 94년 제네바 합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김대중 정부의 야심찬 ‘햇볕 정책’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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