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가치, 미덕인가 악덕인가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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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세계, “경제 실패 주범이다” 비판…교육열·공동체 정신은 성장 원동력
‘지구촌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 가치와 기준이 있을 뿐 아시아적 가치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권위주의적인 아시아 지도자들이 독재 정치를 정당화하려고 쓰는 개념이다.’

최근 서방 언론들이 ‘아시아적 가치’를 표적으로 퍼붓는 화살이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의 몰락은 이러한 비난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5월22일 수하르토 정권의 몰락을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운 정치의 참담한 실패’라고 규정했다.

수하르토의 몰락은 중국 대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중국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지방 정부의 부패가 극심하고 경제 사정도 점점 나빠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89년 천안문 사태 때 중국 학생들이 내세운 ‘민주주의 쟁취’와 ‘부패 처단’ 구호는 수하르토를 거꾸러뜨린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구호와 거의 비슷하다. 인도네시아 사태뿐만 아니라 아시아 금융 위기와 일본 경제 침몰은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동아시아 성장 모델, 80년대 후반 ‘휘청’

물론 이 논쟁을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국가 위상이 가장 큰 일본 모델과 시장 위상이 극대화된 홍콩 모델 사이에 다양한 변형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가치의 중심 개념인 유교 문화도 동북아 일부 국가에만 해당한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한결같이 고속 성장을 했기 때문에 공통점은 분명히 있다. 그 공통점이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는 질서와 안정이 민주주의나 개인 권리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개인 권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왔다. △경제적으로는 정부가 주도하는 수출 제일주의, 저임금과 고된 노동, 높은 저축률, 화합하는 노사 관계를 들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회적 조화와 복종을 강조하는 공동체 의식, 지나친 개인주의 배격, 교육열, 근면·성실을 꼽을 수 있다.

아시아적 가치는 원래 서양 사람들이 70년대 이후 일본을 비롯해서 4마리 용(龍)이라 불린 한국·홍콩·싱가포르·대만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보고 만들어낸 개념이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대학과 연구소는 아시아 각국이 빠르게 성장한 비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들이 앞서 나온 개념이다.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도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고 역설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리콴유는 동양적인 정치와 경제 개발이 중요하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는 동양 문화의 힘과 가족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규율을 강조했다. 80년대에는 불황의 늪에 빠졌던 미국을 서슴없이 비난했다. 미국의 산업 경쟁력과 도덕이 추락하는 이유를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앵글로아메리칸 식의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본 경제에서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서방은 그동안 칭찬해 온 아시아적 가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일본의 금융이 침체하자 미국 같은 일본의 주요 무역 상대국들은 ‘일본 때리기’를 시작했다. 고도 성장을 이룩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일본 모델을 따랐기 때문에 일본 때리기는 곧 아시아적 가치 때리기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일본의 문제를 지적해 온 서방은 97년에 접어들자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지도력을 상실한 ‘아무것도 아닌 나라’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태국에서 금융 위기가 시작되자 전체 아시아권을 향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 박사는 “아시아는 합리적 계약 관계보다는 개인적 친분 관계를 중시했다. 이 때문에 경제 위기가 왔고 앞으로도 회복이 어렵다”라고 진단했다. 리처드 훌브룩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아시아적 가치에는 명확하지 않은 모호함, 연고 자본주의, 이중 규범, 부정 부패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6월2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사설에서 ‘5월24일 있었던 홍콩 입법원 선거 결과는 아시아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민주주의는 안정과 맞바꾸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야말로 안정을 뒷받침하는 가장 든든한 지렛대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더 악의적인 비난도 있다. 지난 5월 미국인 투자가들과 한국을 방문한 경제 전문가 마이클 루이스는 5월31일자 <뉴욕 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에 ‘한국 재벌은 거래하면 안되는 최악의 기업이고, 대우 김우중 회장은 옛 소련 공산당의 늙은 말과 비슷한 존재이다’라고 썼다.

“서방의 핫머니가 아시아 위기 주범”

서방의 비난에 대한 아시아권의 대응이 없을 리 없다. 아시아를 몰아붙이는 것은 서방의 음모이다, 단기간의 거액 자금 이동이 아시아 위기의 원인이다, 단기 자금 이동을 규제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아시아 사람들은 지금부터라도 반성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등등. 아시아 지도자 가운데 아시아 위기와 관련해 서방 음모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이다(52쪽 상자 기사 참조).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아시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6월4∼5일 도쿄에서 국제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국제통화연구소 교텐 도요오 이사장은 “아시아에서 경제 위기를 촉발한 것은 급속하게 들어왔다 빠져나간 서방의 대형 자금이다. 97년에 한꺼번에 빠져나간 자금이 천억달러를 넘는다. 지금부터라도 통제되지 않는 거대 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엔의 국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대장성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재무관은 “아시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엔의 국제화가 필요하다.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엔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아시아권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말레이시아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노르딘 소피시 회장은 “아시아 경제를 안정시키려면 논의가 금융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아시아 지역 간의 협력 관계를 강화해서 경제 구조를 개혁하고 사회를 재개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시아적 가치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홍콩 행정청 안숀 찬 정무관은 아시아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기업·금융기관 정보를 적극 개방하고 △금융 당국과 주주가 시장 정보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정치적 개입을 그만두고 경제를 시장 원리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만의 하이테크 기업 TSMC가 이를 실천한 좋은 사례이다. 87년 설립 때부터 이 기업은 아시아형을 고집하지 않고 미국 기업 모델을 채택했다. 회사 경영은 월급쟁이 전문 경영자가 맡고 있다. 이 회사는 정기적인 주주 총회나 기자 회견을 통해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있다. 사내에서는 영어를 쓰고, 재능만 있으면 출신국을 묻지 않고 채용한다.

시대 변화에 맞는 취사 선택이 중요

그러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지역적 특수성을 들면서, 서방이 일방적으로 자기 논리를 강요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한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공평과 합리보다는 균등과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농경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급속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경쟁 개념이 뿌리 내리지 않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데도 어려움이 크다. 잦은 외침에 시달린 결과 가족 중심적 사상이 깊고, 그래서 가족 중심의 경영 체제가 정착했다.”

무엇이든 버릴 것과 취할 것이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한림대 김영명 교수는 아시아적 가치 가운데서도 가족 간의 유대감, 상호 소통적인 인간 관계, 교육, 합법적인 권위, 사회 질서를 중시하는 경향은 앞으로도 유지해야 하는 소중한 규범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김교수가 지적한 가치들은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아시아적 가치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려면 합리주의·투명성·시장 원리·개인 존중 같은 서양 가치와 접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적 가치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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