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부패로 러시아 개혁 '표류'
  • 이인석 (KOTRA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장) ()
  • 승인 1996.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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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빈층 등에 업고 공산당 부활…6월 대선서 국가 운명 판가름
1억40만 러시아 유권자들은 지난 12월17일 두마(하원) 선거에서 쥬가노프가 이끄는 공산당을 제1당으로 선택했다. 22일 현재 예측 최종 득표를 보면, 총 4백50석 중 공산당이 1백57석(34%)을 차지했다. 그 다음이 정부·여당인 ‘우리집 러시아당’이 54석(12%), 극우파인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이 49석(11%), 개혁주의자들이 모인 야블로코당이 48석을 차지했다. 1백42석(32%)은 무소속에 돌아갔다.

예상한 대로, 걸어다니는 시체나 다름 없었던 공산당이 러시아 정치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 수년간 개혁의 풍랑 속에서 희망 하나에만 의지해온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가 잃은 자가 되어 깊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금생활자, 구시대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노년층이 러시아를 약속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공산당의 구호에 표를 던진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시 구체제로 돌아가겠다는 러시아인은 아무도 없다.

공산당, 실권 없어 정책 주도 불가능

93년 지리노프스키가 대(大) 러시아의 꿈을 들고 나와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번 하원 선거에서는 개혁 정치가 양산해 낸 빈곤이 공산당을 일으켜 세우는 데 지렛대 구실을 했다. 통계에 따르면, 지금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 최저 생활자들이다. 이들은 비참한 현실을 옐친의 개혁 정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다.

러시아 사회 전체에 무서울 정도로 만연해 있는 부패도 공산당의 승리를 부추긴 또 하나의 주역이다. 러시아인들의 혼을 좀먹고 있는 부패는 공산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막을 수 없다. 거기에 범죄 조직까지 당당히 의회로 진출하고 있다.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입후보자의 상당수가 살인·사기·공갈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범죄와 정치가 한몸이 되는 괴기한 사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4년 동안 러시아 정치는 공산당과 동거 시대를 맞게 된다. 과연 공산주의자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것인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34%의 의석으로 정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더욱이 러시아의 국가 권력은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다. 하원은 대통령이나 정부가 결정한 사항을 자문하는 구실을 함에 불과하다.

쥬가노프는 자신이 풀 수 없는 난제를 안고 있다. 개혁 정치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그를 지지하는 당원이 무려 50만이며, 이들 대부분은 개혁 정치로 인해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55세 이상 빈민층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재건하고 에너지·군수·수송 등 기간 산업을 완전히 국가가 통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거기다가 정부 보조를 대폭 확대하고 새로운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쥬가노프로서는 하원의 권력 한계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다. 옐친이 장악하고 있는 연방 의회가 하원의 법안을 승인해 주어야 하는 데다, 그에 앞서 두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절대 과반수가 찬성해야 법안이 통과된다. 34%의 의석으로는 하원에서조차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1당이 되었으면서도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2년 전 하원의장을 맡았던 류비킨도 의회에 들어 오기 전에는 지극히 반동적인 인사였으나,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에는 옐친의 최측근 인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쥬가노프 역시 권력의 중심부를 맴돌다가 언젠가는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입으로는 사회민주적 강령을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러시아는 중도나 좌는 없고 오로지 우만 있는 특이한 나라다.

공산당이 앞으로 러시아 정치에 미칠 영향은 극히 제한된 범위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러시아의 운명은 오는 6월 실시될 대통령 선거에서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하원 선거는 차기 대통령 입후보자의 인기를 측정하는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개혁 정치에 대해 경고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옐친 건강도 6월 대선 변수

이번 선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쥬가노프나 지리노프스키 누구도 대통령 직을 자신있게 노릴 수 있을 정도로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단일 후보를 낼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쥬가노프 스스로가 자신을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하고, 1천5백만 민족주의자들이 배후에서 떠받치고 있는 지리노프스키 역시 두 얼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경우 옐친이나 특권 부유층의 옹호자인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옐친이 재집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 2월 재출마 여부를 밝힐 것으로 보이는 옐친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소득을 많이 올린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이면 65세가 되고 건강 상태도 예측을 불허할 정도인 그가 과연 러시아를 짊어지고 또다시 5년간 대통령 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회의적인 시각이다.

쥬가노프는 기자 회견에서 총리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나왔다. 옐친으로서는 개혁 노선을 수정하는 일이 발등의 불처럼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까지는 불과 6개월, 노선을 바꿀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 이미 선거전은 시작된 상태다. 그가 내놓을 처방이라고는, 공산주의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개혁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유권자들에게 강조하는 일뿐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자들이 특권층을 무시하고 개혁 의지를 밀고 나가기도 힘들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다시 개혁과 반개혁 세력으로 나뉘어 치열한 노선 투쟁에 돌입하면서 심각한 분열을 맞게 될 것이다. 더욱이 물질적인 것은 고사하고 심리적으로도 옐친에게 국정 수행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러시아는 다시 정치적 공황에 빠질 위험에 부딪치게 될는지 모른다. 그것은 권력이 법치의 틀을 빠져나와 보이지 않는 세력들에 조정되는 상태이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 국가를 지배하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체첸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러시아호는 바로 그같은 국가 권력의 진공 상태 쪽으로 한발짝씩 움직여 가고 있다. 두마의 의석이 어떻게 배분되든 관계없이 러시아의 정치 기류는 악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정치 운명을 결정하게 될 대통령 선거가 앞으로 6개월 남았다. 그때까지는 러시아의 서방 정책에 변화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독일이 전력을 쏟고 있는 나토의 동유럽 확대 작업에 러시아는 어떤 형태로든 위협으로 맞설 것이며, 한편으로는 국제 기구에 편입하려는 노력도 아울러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서유럽을 다시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독일은 지정학적·역사적 이유로 말미암아 러시아 사태에 가장 민감한 나라다.

한 나라 내부의 자유 성숙도와 국경 밖에 대한 압력은 반비례한다는 것이 경험 법칙이다. 러시아가 혼미 상태로 빠질 때 유럽이 불안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유럽, 러시아 지원 적극 나서야

이번 선거 이후 러시아 정국은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박처럼 방향을 찾지 못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에 개혁 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유럽에 평화가 정착되기는 어렵다. 93년 한 해에 나토 회원국들이 지불한 방위비는 무려 6천억달러에 달한다. 같은 해에 러시아에 대한 경제 지원액은 70억달러였다. 유럽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서유럽이 발벗고 나서야 할 때다. 독일은 90년 이후 지금까지 무려 천억마르크를 러시아에 지원했다. 거의 혼자서 러시아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경제 지원뿐만 아니라 나토와 유럽연합(EU)에 러시아가 가입하도록 촉구하는 한편 G7에도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악인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선인으로 만들 수 없듯이, 빈곤과 고립 상태로 남아 있는 한 러시아가 민주 사회로 이행하기 어렵다고 독일은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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