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라초 꾸짖는 언론의 위선
  • 베를린·金鎭雄 통신원 ()
  • 승인 199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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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기자단, “상업주의 언론에도 책임” 지적
다이애나의 죽음을 계기로 ‘파파라초’(‘파파라치’는 복수 명사임)로 대변되는 황색 저널리즘이 전세계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적 언론단체 ‘국경 없는 기자단’(RSF)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파파라초의 보도 행태에 대한 전면 조사에 착수했다. <시사저널>은 국경없는기자단 본부에 의뢰해 현재까지 작성된 중간 보고서를 구했다. 이 보고서는 기자단 본부가 전세계 특파원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와 기 프에 파리고등언론연구소 교수, 필립 조르다 네덜란드 국제공법재판소 판사, 정홍균 재미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의 의견을 취합하고, 김비태 서울 특파원이 대표 집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85년 창설된 국경없는기자단은 전세계에 특파원 1백20명을 두고 언론인 보호 및 언론 상황 감시를 주임무로 해온 국제 언론 단체로,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NGO)이기도 하다. <편집자>

다이애나가 사망한 소식과 함께 파파라초의 행적이 사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파파라초’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어느 파파라초는 최근에 파파라초들이 언론으로부터 추격을 받고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자 그들에게 쫓기던 연예인·저명 인사들의 고충을 이해할 정도라고 말한다.

파파라초의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은, 정론지라 분류되던 일반 언론들도 다이애나 사망 이후 황색 저널리즘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우려다. 전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파파라초를 비난하고 고발하지 않는 신문이나 방송을 찾기 힘들다. 세계 곳곳에 상주하고 있는 국경없는기자단 특파원 1백20명이 보내오는 현지 보고서에도 한결같이 현지 언론들이 황색 저널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파파라초의 본질적 문제점을 다루어야 할 정론지들이 비난 기사와 함께 정작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파파라초가 찍은 사진을 모두 게재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사진통신사 시파(SIPA)의 한국 대표 신용욱씨에 따르면, 한국의 유력 일간지조차도 <더 선> <파리 마치>와 같은 황색 언론의 자극적인 사진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나마 저작권에 대한 협의 없이 무단 게재하기 일쑤라고 한다.

파파라초는 ‘모기’와 ‘번개’의 합성어

파파라초들은 저명 인사들의 삶을 24시간 추적해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절묘한 장면을 찍어 천문학적인 액수를 받고 언론사에 판다. 경우에 따라 사진 한 장에 수백만원에서 수십억원을 받고 넘긴다. 이번 사고로 다이애나와 함께 희생된 이집트 백만장자의 아들 도디 알 파예드 2세가 지난달 초 남프랑스 앞바다 배 위에서 밀애하는 장면을 찍은 이탈리아의 파파라초 마리오 브래나는 이 사진으로 10여 일 만에 천만 프랑(15억원)을 벌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모나코 스테파니 공주의 남편 다니엘 듀크류에가 어느 벨기에 스트립 걸과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 이탈리아 주간지에 실려 이혼당하기도 했다.

국경없는기자단에 접수된 세계적인 스타들의 피해 사례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의 경우 파파라초가 병실에 안치된 아들의 시신을 찍기 위해 간호사 복장을 하고 들어와 소동을 벌였고, 카트린 드뇌브는 출산하자마자 파파라초가 회복실 창문 너머의 집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해야만 했다. 파파라초 실태를 조사하다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진 1장을 찍기 위해 동원하는 그들의 장비다. 정보기관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전자장치와 도청 장비는 물론 헬리콥터·잠수함까지 동원한다.
파파라초라는 단어는 59년 세계적인 이탈리아 영화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감독한 달콤한 인생이라는 의미의 <라 돌체 비타>에 등장한 인물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어로 파파타치(papatacci)는 모기, 라초(razzo)는 번개라는 뜻이다. 결국 파파라초는 모기떼처럼 몰려들어 번개처럼 플래시를 터뜨리는 귀찮은 존재라는 의미다.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62년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드 바르도가 출연한 <사생활>이라는 영화에 파파라초가 등장하고부터다. 프랑스통신사연맹(FFAP/SAPHIR) 사무국장 자크 모란다는 “파파라초라는 용어는 편의상 경멸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 직업으로 분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파파라초의 활동을 비난하면서도 “정상적인 보도 사진은 외면하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황색 사진을 많은 돈을 주고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언론 매체가 오히려 비난 받아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영상 매체가 발달함으로써 독자들은 영상화한 뉴스에 익숙해져, 활자 매체도 읽는 뉴스보다는 보는 뉴스를 선호한다. 이러한 추세는 드라마틱한 요소와 센세이셔널한 요소를 더 많이 요구하게 된다. 최근 경쟁적으로 다이애나 특집을 내고 있는 영국의 <데일리 미러>는 ‘숙녀로 태어나, 공주가 되어, 성녀로서 떠나다’라고 그의 생을 평가하고, <선>은 그녀를 ‘천사와도 같았다’고 애도했다. 물론 이러한 매체들은 파파라초의 사진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시파 파리 본사 대표 곡신 시파이오글루는 황색 신문들이 인기 연예인이나 저명 인사의 사생활을 캐고 쇼킹한 사진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로 ‘보도 내용과 관련해 소송이 제기되더라도 그 비용이 자극적인 내용이나 사진을 게재해서 얻을 수 있는 판매 이익에 비해 미미해서’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황색 저널리즘을 부채질하는 것은 바로 독자라는 것이다.

목숨 걸고 분쟁 지역 취재하는 사진 기자들

일확천금을 노리고 특종 사진을 찍기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해 가며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파파라초의 활동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 매체들이 본질적인 문제 의식 없이 단순히 그들을 비윤리적인 사진 기자쯤으로 매도함으로써 사진 기자들의 취재 활동 자체를 제한한다면 새로운 사회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다이애나를 뒤쫓던 파파라치 중에 천안문 사태 특종으로 보도 사진 부문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사진 기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언론의 자유는 무엇을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며, 알 권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사유와 정의를 뒤로 미룬 채, 고귀한 생명을 대가로 사회적 영향력과 함께 책임도 져야 하는 공인들이 개인적 편의를 위해 언론의 정당한 활동과 기능을 축소하려고 시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욱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책임을 파파라초에게 지우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파파라초의 활동을 법으로 제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초상권·사생활 보호법이라는 것도 공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프랑스에서는 공인·사인 구분 없이 적용됨). 사생활의 자유가 법으로 가장 잘 보장되어 있다는 프랑스에서조차 이번 사건에 연루된 파파라치를 처벌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의 에르베 스테판 수사 검사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지난 3일 마케도니아 출신 파파라초 니콜라스 이르소프와 프랑스 사진 기자 자크 랑주뱅 등 7명에 대해 최고 징역 5년과 벌금 50만프랑(약 7천4백만원)을 부과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진 자를 돕지 않은’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그러나 자크 랑주뱅의 경우 천안문 사태를 전세계에 알린 베테랑 보도 사진 기자다. 그는 이미 사건 발생 이후 사고 장소에 도착했음을 진술하고 국경없는기자단에 법률 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프랑스통신사연맹은 ‘파파라초를 포함한 사진 기자 모두를 사자 우리에 던지기 전에 바로 그들이 전세계 분쟁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 활동을 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국경없는기자단은 지난 9월3일 성명서를 통해 ‘사생활 보호를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구실로 특정 직업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일부 정치가들의 의도적인 발언’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파파라초들은 이번 사건을 반성해야 하며,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기에 급급한 많은 언론과 시민들도 책임을 나누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토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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