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국가들, 공산주의 '꿈틀'
  • 파리·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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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동유럽 국가들, 공산당 출신 지도자 일색…강력한 민족주의 내세워
공산주의가 되돌아오는가?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좌익 전체주의가 새롭게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옛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의 정치 지형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공산주의자들의 재등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된 옛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반공산주의 운동의 전통이 강했던 체코를 빼놓고, 옛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에서는 하나같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옛 공산주의자들이 재집권하거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민족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로 신장 개업한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헝가리에서는 94년 총선에서 옛 공산당의 후신인 헝가리사회당이 재집권했다. 기울라 호른 총리는 비록 친서방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자로 뼈가 굵은 사람이다. 폴란드에서는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옛 공산주의자들을 결집한 알렉산드로 과스니예프스키가 바웬사를 누르고 집권했고, 92년에 재집권한 루마니아의 이온 일리에스쿠는 비록 지금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는 있지만 차우셰스쿠 체제에서 핵심 공산 당료였다.

불가리아의 경우 젤리오 젤레브 대통령은 공산 치하의 반체제 인사 출신으로서 반공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는 단지 국가를 형식적으로 대표할 뿐 실권이 없다. 반면에 지난해 1월 총리로 지명된 뒤 신공산당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안 비데노프는 옛 공산당 후신인 불가리아사회당의 총서기를 겸하고 있다.

철권 통치와 개인 숭배로 정권 유지하기도

유고 내전을 통해 소아병적인 민족주의자로서 국제적인 ‘명망’을 획득한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과 크로아티아의 프란요 투지만 대통령 역시 그들의 정치적 이력을 공산당원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 역시 옛 유고연방 시절 티토 밑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경력을 지니고 있다.

냉전 시절부터 반소 감정이 드높았고 지금도 높은 발트 해 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90년 3월11일 발트 해 연안국 가운데 최초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해 연방 해체에 기폭제가 된 리투아니아는 92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 대통령 란트스베르기스 대신 공산당 출신인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를 선출함으로써 세 나라 가운데 냉전 체제 붕괴 이후 공산당이 최초로 재집권한 나라가 되기도 했다. 에스토니아 역시 95년 3월 총선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옛 공산주의자들이 재집권했고, 라트비아도 95년 12월 총선 이래 옛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농민당과 함께 연립 정부를 이끌고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하다. 옛 소련 연방국 중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나라인 카자흐스탄은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여전히 옛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카자흐스탄 공산당 서기장인 누르술탄 나제르바이예프가 대통령으로서 다스리고 있다.

올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할 몰다비아의 미르차 이온 스네구르 대통령, 94년 7월에 선출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쿠츠마 대통령,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그루지야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역시 모두 옛 지역 공산당의 책임자 출신이다. 타지키스탄의 이야말리 라흐소노프 대통령은 내전 와중인 92년에 러시아군이 대통령 자리에 앉힌 공산주의자다.

92년에 집권한 투르크메니스탄의 세파르무라드 니야조프 대통령, 그보다 한 해 전에 집권한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93년 8월에 집권한 아제르바이잔의 게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 94년 7월에 집권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첸코 대통령 등은 단순히 그들이 공산당 최고위직 출신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옛 연방 시절 못지 않은 철권 통치와 개인 숭배로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조프는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98.3%의 지지를 얻었고, 2년 뒤의 선거에서는 99.5% 지지를 얻었다. 그의 초상화는 모든 건물과 집단농장에 걸려 있고, 그의 동상은 광장마다 서 있으며, 그의 웃는 얼굴은 이 나라 은행권에 박혀 있다. 그는 탈냉전 시대에 서남아시아의 스탈린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가 이끄는 민주인민당(공산당) 역시 지역 국가보안위원회(KGB) 도움으로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98% 지지를 얻었다. 야당 주요 지도자는 감옥에 있거나 도피 중이거나 망명 중이다.

브레즈네프 시절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출신으로 국가보안위원회에서 25년간 일하기도 한 아제르바이잔의 알리예프는 언론 검열, 정적에 대한 도청과 감시, 선거 조작에 의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고, 옛 소련군 정치위원 출신인 벨라루스의 루카첸코 역시 반외세와 민족지상주의를 선동하여 집권한 뒤 독립 언론 폐간, 정적 투옥, 노조 순치 등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새로 집권한 공산주의자들은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추진하고 있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빼고는 예전과 달리 위험스러울 정도로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에게서 과거의 국제주의는 그 편린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최근의 공산당 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복귀라기보다는 자본주의화 과정 실패에 따른 구체제 회귀와 민족주의 기승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자”

공산당들의 이런 민족주의적 경향은 옛 소비에트 연방과 유고 연방을 이루고 있던 국가에서 특히 강하다. 옐친의 재집권을 위협하는 러시아공산당의 쥬가노프 역시 반미주의·반서방주의를 첫째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미국의 침략에 맞서 러시아를 구원해야 한다는 쥬가노프의 선동은 소련 해체와 자본주의화 이후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의 위세가 급격히 추락하는 것을 지켜본 러시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민족주의적 구호들이 유권자에게 먹혀들자 최근 들어서는 옐친까지 민족주의적 구호를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옐친의 개혁 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정이 공산당의 복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과거의 공산당 지도자들 못지 않게 권위주의적인 옐친 치하에서는 국영기업의 70%가 민영화된 이 시점에서 3천만이 넘는 러시아인이 극빈 상태에 놓여 있고, 마피아가 밤낮으로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체첸에서의 포화는 잦아들 줄 모르고 있다. 55세가 넘은 러시아인의 43%가 옛 공산 체제 복귀를 바라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역시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서방의 옐친 지지 역시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차악의 선택일 뿐 결코 전면적인 것이 아니다. 서방 지지에 힘입은 옐친이 최근 인기를 회복하고 있어서 2차 결선 투표에서는 쥬가노프를 누르리라는 예상이 커지고는 있지만, 만일 공산당이 재집권할 경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러시아 사회의 극심한 혼란과 국제 관계 긴장일 것이다.

공산당이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영화 기업의 재국유화나 외국 자본에 대한 통제 때문만이 아니라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최근 소련 재건을 결의했다는 사실 때문에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옐친의 재집권 역시 러시아 사회에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러시아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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