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대 법대생들 "관료는 싫어"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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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생, 관직 선호도 줄어 ··· 대학원 등으로 진로 다양화
‘도쿄 대학 법학부’는 자타가 인정하는 고급 관료 양성소이다. 그것은 관청 중의 관청으로 불리는 대장성을 비롯한 중앙 부처 간부들이 대개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메이지(明治) 시대 이래의 그런 전통이 요즘 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일본 학원가에 화제가 되고 있다.

<도쿄 대학 신문>이 최근 집계한 법학부 취직 통계에 따르면, 5년 전 대장성·통산성을 비롯한 중앙 부처에 취직한 졸업생은 모두 1백13명이었다. 그런데 올해 3월에 졸업한 학생 중 중앙 부처에 취직한 사람은 87명으로 줄었다. 5년 사이에 20% 가량이 감소한 셈이다.

도쿄 대학 법학부 당국자는 법학부 졸업생들의 이같은 ‘가스미가세키(중앙 관청가) 이탈 현상’을 단순히 법학부의 정원이 그동안 줄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서 법학부 정원이 감소함에 따라 중앙 부처에 취직한 졸업생의 절대적인 숫자도 함께 줄었다는 것이다. 법학부 당국은, 비율로 따지면 여전히 중앙 부처에 취직하는 학생이 전체 졸업생의 15%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법학부 학생들이 중앙 관청가를 이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추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학생이나 중앙 부처 취직담당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한 중앙 부처와 증권회사에 합격이 내정된 4학년 A군은 관청에 취직하더라도 정년까지 근무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는 장차 국제 금융 분야에서 나래를 펴볼 생각이다. 그러나 관청에서 기업으로 옮기기는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기업에서 관청으로 옮기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우선 중앙 부처에 취직하려고 한다. 그런 뒤 관청의 해외 유학 제도를 이용해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면 관청을 그만둘 생각이다.

한 중앙 부처의 인사담당자도 얼마 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 간부들이 배석한 면접 시험 때 일이다. 도쿄 대학 법학부 학생이 채용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10년 내에 그만둘 생각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간부급 관료들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다.

중앙 부처 관료들 위상 떨어진 것도 ‘한몫’

도쿄 대학 법학부 학생들이 ‘가스미가세키’를 이탈하려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데는 중앙 부처 관료들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우선 일본 정부는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내년 1월1일부터 중앙 부처를 현행 ‘1부 22성 체제’에서 ‘1부 12성 체제’로 개편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중앙 부처의 주요 자리도 대폭 줄거나 변경된다. 예컨대 중앙 부처 국장 자리가 현재의 1백28개에서 98개로, 과장과 실장 자리가 1천1백66개에서 9백97개로 줄어든다. 물론 관료들이 저항해 국장급 자리가 16개, 과장급 자리가 86개 신설되지만, 이전에 비해 절대수가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다.

‘관료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부대신(副大臣)’ 제도도 도입된다. 다시 말해서 관료들의 막강한 파워를 통제하기 위해 현재의 유명무실한 정무차관 제도를 폐지하고 각 부처에 1∼3명씩 부대신과 정무관을 두게 된다.

‘관료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 일본은 정치인보다는 관료가 각종 행정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관료보다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정치인 출신 대신·부대신·정무관이 한 팀을 이루어 중앙 부처를 장악하게 되면 관료들의 힘이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이 장악해 온 ‘관청 중의 관청’ 대장성의 위상 하락도 현저하다. 일본 정부는 무소불위의 대장성을 분할하라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대장성의 재정 업무와 금융 업무를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7월1일 금융청을 발족시켰다.

금융청은 대장성의 금융기획국과 2년 전 발족한 금융감독청이 통합해 발족한 기관이다. 금융 검사·감독 기능은 물론 대장성의 증권거래소 감독 권한마저 이관되어 대장성은 재정 편성과 집행을 담당하는 부처로 전락했다.
경찰 업무를 총괄하는 경찰청도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들이 장악해 온 부처이다. 그러나 최근 고급 간부들의 잇단 불상사로 인해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 경찰 간부들에 대한 여론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 다시 말해서 고시파 법학부 출신이 일선 경찰서 근무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승승장구하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게 된다는 비판이다.

경찰청은 경찰쇄신위원회를 만들어 경찰 조직을 재검토한 뒤, 고시 출신들에게 일선 경험을 할 기회를 더 많이 주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만 해도 법학부 출신 고시파들은 임관한 지 4년 만에 곧바로 경시로 승진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두 배인 7∼8년을 근무하고 각종 근무 평점을 받아 경시로 승진하게 된다. 이와 함께 비고시파 출신을 경찰 간부로 등용하는 문도 넓혔다.

도쿄 대학 법학부 학생들이 ‘가스미가세키 지향 성향’이 강했던 것은 관료 사회의 막강한 파워만 동경했기 때문은 아니다. 중앙 부처 관료를 그만둔 후에도 또 다른 제2의 인생을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큰 매력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관료 사회에서는 동기생이 국장에 승진하면 처진 동기생은 사표를 내는 것이 관례이다. 대신 중도 하차한 관료에게는 남은 관료들이 책임을 지고 제2의 직장을 알선해준다.

이런 낙하산 제도를 타고 산하 기관에 재취직한 간부들이 퇴직할 때 받는 퇴직금은 엄청나다. 총리부 집계에 따르면, 공익 법인의 임원으로 재취직한 전직 관료들이 퇴직하면서 3천만 엔 이상 퇴직금을 받은 사람은 과거 10년간 2백명이 넘은 것으로 밝혀졌다. 5천만 엔을 넘게 받은 사람도 47명에 달했다.
그러나 자민당·공명당·보수당 등 여당 3당은 관료들이 공익 법인과 특수 법인에 낙하산을 타고 재취직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개혁을 추진할 방침이다. 그렇게 되면 2005년부터 관료들이 낙하산을 타고 산하 기관에 취업하는 것이 일절 금지된다.

그렇다면 중앙 부처 이탈 경향을 보이고 있는 도쿄 대학 법학부 학생들의 발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도쿄 대학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과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학생이 현저하게 늘고 있다. 우선 대학원 정원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대학원에 다니면서 천천히 진로를 결정하겠다는 대학원 진학파도 올해 58명에 달했다. 개중에는 통산성의 합격 내정을 뿌리치고 진학한 학생도 있다고 한다.

일류 금융기관 지원율도 낮아져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학생도 많이 늘었다. 사법시험 채용자 수가 10년 전의 5백 명에서 천 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 합격자도 갑절로 늘어 지난해에 2백29명이 합격했다.

재학생 3명 중 1명이 합격하고 있는 셈이다. 법학부 당국은 이같은 현상을 50∼60세까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이 눈에 띄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래를 위해 우선 자격을 따놓고 보자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반대로 급료가 높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일류 금융기관 지원율은 낮아지고 있다. 다이이치간쿄·도쿄미쓰비시·후지·스미토모·산와 은행 등에 취직하는 학생이 해마다 줄고 있는 것이 좋은 증거이다.

법학부 학생들은 일본의 일류 은행에 취직하더라도 20대 몇년 간은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예금 모집에 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시간들이 ‘인생의 낭비’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대신 조건이 훨씬 좋은 외국계 금융회사 문을 두드린다.

올해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국계 증권회사에 취직한 B씨는 “재학중에 어학연수 비용을 회사가 대주며 1개월간 뉴욕에서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초봉 연수도 관청의 배인 약 6백만 엔이다.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도 파격적이어서 주저없이 이 회사를 택했다”라고 밝혔다.

일본의 최고 관료 양성기관으로 꼽히는 도쿄 대학 법학부. 그러나 그들이 ‘관료 일변도’에서 벗어나 진로를 다양하게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그만큼 다양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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