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호 납치범들의 북한 생활 30년
  • 이철현 디지털팀 기자 (leech@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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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러국' 제외 조건으로 적군파 4명 추방 요구
지난 8월9∼10일 평양에서 열린 북·미 ‘테러 회담’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조건으로 마이크 시언 미국 테러담당 대사가 내놓은 요구 조건은 세 가지이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두 가지 조건, 즉 명시적 테러 포기 선언이나 각종 반(反) 테러기구 가입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북한이 수용하기 까다로운 조건이 세 번째 항목이다. 미국은 1970년 3월 일본항공 소속 여객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북한에 들어간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은 시리아나 레바논에서 활동한 적군파와 달리 활발히 활동하지 않아 행적이 베일에 가려 있었다. <시사저널>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알게 된 계기는 다나카 요시미가 1998년 말 <시사저널> 기자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생으로 요도호 납치에 가담했던 요시미는 1996년 북한산 위조 지폐를 유포한 혐의로 태국 촌부리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기자는 1999년 1월 태국 촌부리 형무소에서 그를 만나 요도호 납치범임을 확인했고, 위조 지폐 혐의가 무죄라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했다(<시사저널> 제486·487호 기사 참조). 기자는 무죄 판결을 받고 일본 송환을 기다리는 요시미를 올해 1월 방콕 클롱프렘 형무소에서 다시 만났다.
잡지 발행·무역회사 운영하기도

요도호를 납치한 적군파 테러리스트는 모두 9명. 사건 당시 20세 안팎이던 요도호 납치범들은 이제 50세가 넘은 초로의 나이이다.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만 일본인이 아니고, 북한에서 30년 가까이 살았지만 북한인이 되지 못한 처지이다. 요도호 사건이 일본인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져가듯이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은 정체성 위기를 겪으며 하나둘씩 숨을 거두고 있다.

지도자 격인 다미야 다케미로는 1995년 12월 심장마비로 북한에서 죽었다. 그보다 앞서 1985년과 1988년 요시다 긴타로와 와케로 다케시가 망명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금 살아 있는 요도호 납치범은 6명. 이 가운데 다나카 요시미는 태국 형무소에서 지난달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시마다 야스히로는 일본에 돌아가 5년형을 살고 출소해 일본에 살고 있다.

요도호 납치범들은 북한에 발을 디딘 후 5∼6년 동안은 사회주의 혁명 모델을 연구하며 보냈다. 러시아·중국·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고 토론을 거듭했다. 쿠바·멕시코·중동에서 활동하는 적군파 테러리스트와 정보를 교환하며 활동 폭을 넓히기도 했다. 그들은 연구와 실천을 통해 얻은 성과물을 모아 1970년대 계간지 <일본을 생각한다>를 발행했다. 그 잡지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운동권에서 광범위하게 읽혔다. 그러다가 1980년 중반 <자주와 단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요도호 납치범들은 주체사상에 물들기 시작한 듯하다.

그들은 이 잡지를 발행하면서 2·1 무역회사와 상점을 차려 일본을 상대로 무역을 했다. 건어물이나 농산물 같은 1차 산업 제품을 일본에 공급했다. 다나카 요시미는 미국의 경제 제재로 무역 업무가 난관에 부딪히자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들어가 일본계 캄보디아인과 함께 무역회사를 차렸다가 미국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국과 캄보디아 경찰에 검거된 것이다.

납치범들의 꿈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일본 국적을 취득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시마다 야스히로처럼 징역형을 견디거나 자기 신념을 포기하고 일본 정부에 투항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념을 버릴 만큼 아직 늙지 않았고, 5∼10년 징역형을 감수할 만큼 젊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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