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핵 잠수함과 함께 '침몰'
  • 모스크바·이건욱 통신원 ()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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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군부, 사고후 늑장 대응 · 사실 은폐로 비난 '봇물'
러시아 북해함대 소속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인 ‘쿠르스크’ 호가 8월12일 오전 11시께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 해에서 훈련하다가 원인 모를 사고를 일으켜 침몰했다. 쿠르스크 호는 서방 진영에서 오스카급으로 알려진 949급 전략 핵잠수함으로 항공모함 추적 및 격침용이며, 1994년 건조되어 이듬해부터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잠수함의 길이는 154m, 너비는 18.2m이며 장교 52명을 포함해 1백7명이 승선하고, 최고 속도 28노트로 항진할 수 있다. 게다가 핵탄두 미사일을 최대 24기 탑재하고, 최대 수심 500m에서 1백20일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그야말로 러시아 해군의 간판 스타 중 하나이다.

사고 원인조차 파악 못해

침몰 직후 블라디미르 쿠로도예프 러시아 해군사령관은 인터뷰를 통해, 대규모 충돌이 있었는데 무엇과 충돌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도 무엇과 부딪쳤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이나 여러 잠수함 전문가들은 외국 잠수함과의 충돌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해군참모본부는 쿠르스크 호가 현재 1백7m 해저에 있으며, 침몰후 사고 해역에 구조함 5척과 원자력 순양함·항공모함·구축함 등이 집결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핵 누출 문제에 대해 이고르 디갈로 러시아 해군 공보실장은 침몰한 잠수함에 핵무기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으며, 방사능 누출도 현재까지는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방 전문가들은 핵 추진 잠수함이 손상되었을 경우 방사능 유출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측 발표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사고 잠수함에 승선한 승무원은 훈련 감독관 등이 포함되어 1백18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인 바렌츠 해는 냉전 종식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다가 이번 사건으로 또다시 눈길을 모으게 되었다. 실제로 냉전이 종식된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바렌츠 해를 두고 아직도 열강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바렌츠 해는 러시아 북해함대의 기항 세베로 모르스크와 무르만스크가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는 흑해와 발틱해의 전략 항구를 거의 잃다시피 해(흑해함대 거점은 우크라이나 영토인 세바스토폴에 있고, 발틱함대 본부인 칼리닌그라드는 발틱 3국에 둘러싸여 있다), 바렌츠 해에 최신 잠수함을 배치하는 등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렌츠 해는 러시아 북해함대의 훈련이 벌어지면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군의 전력을 파악하려 하고, 또 러시아군은 나토의 대응 능력을 확인하느라 항상 ‘분주한’ 곳이었다.

또한 이번 북해함대 훈련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강한 러시아’를 천명한 이후 최대 규모 훈련이어서, 바렌츠 해는 나토의 감시선과 잠수함 들로 메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러시아 해군 당국은 쿠르스크 호가 외국 잠수함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사고 해역과 가까운 곳에서 미 해군 정찰함 ‘로열’ 호가 활동했으나 이번 사고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간 강력히 주장해온 해군력 강화 공약이 잠수함과 더불어 침몰하는 수모를 당했으며, 그동안 다져놓은 국제적인 위상에 타격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지난 7월30일 발틱함대의 기지인 칼리닌그라드에서 있었던 러시아 해군의 날 기념식에서 러시아 해군을 세계 최강 대열에 올려놓겠다고 공언했는데, 한 달도 못되어 이런 참사를 당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푸틴, 휴양지에서 보고받아 ‘입방아’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을 보면서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다. 아직도 구태에 빠진 군부가 국민들의 알 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호가 토요일에 침몰했는데도 일요일에 침몰했다고 발표한 것,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바렌츠 해의 기상 상태가 양호했는데도 구조 작업을 월요일부터 시작한 것, 군사 기밀이 노출된다며 미국·영국·노르웨이 등이 승무원 구조 작업을 돕는 것을 거절하다가 여론에 못 이겨 받아들인 것 등 석연치 않은 점들에 대해 러시아 군 당국은 침묵이나 묵살로 일관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적 재난 사고라고 말한 푸틴 대통령이 휴양지에서 상황을 보고받으며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러시아인들은 분을 참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푸틴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의 시샘을 자아낼 만큼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지난 8월8일에 있었던 모스크바 푸쉬킨 광장 폭발 사건과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으로 그에게는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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