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스 · 스위스 은행의 "금괴 커넥션"
  • 프랑크푸르트·허 광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7.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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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은행들, 나치스와 밀거 래·유태인 계좌 가로채기 흑막 드러나
지난 7월23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여름 휴가 계획에 들떠 있던 유럽 사람들은 조간 신문에 실린 색다른 전면 광고를 보고 놀랐다. 스위스 은행연합회 이름으로 나온 광고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1천8백72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철저한 비밀 보장을 자랑하는 스위스 은행들이 50여 년 전의 고객 명단을 공개한 것이다. 세계 27개국(19개 언어) 주요 일간지에 동시에 실린 이 광고는 이들 예금주나 상속인 들의 생존이 확인되면 지난 50년 간의 원금과 이자(4천2백만달러 상당)를 돌려준다는 내용과 함께, 오는 10월20일에 두번째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알렸다.

반 세기 넘게 스위스 은행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예금주들 이름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면에는 수백 년 이래 가장 추웠다는 지난해 어느 겨울 밤의 일화가 숨겨져 있다.

취리히의 경비용역업체에서 일하는 경비원 마일리는 지난 1월9일 평소와 다름없이 시내 중심부에 있는 스위스 은행의 문서폐기실을 점검하다가 폐기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서류뭉치 한 더미를 보게 되었다. 마일리는 호기심에서 그 중 일부를 뒤적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손에 놓인 서류가 나치 독일과 스위스 은행의 비밀 거래 내용을 적은 장부였던 것이다.

그는 장부 2개를 외투 자락에 감추고 총총히 은행문을 나섰다. 그는 다음날 자신이 확보한 문건을 유태인 단체에 넘겼는데, 이 문서가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스위스 은행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스위스 은행들은 지난 2년 내내 나치스가 처형한 유태인들의 은행 계좌를 공개하고 또 나치스로부터 넘겨받은 금괴를 내놓으라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은행측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외부 압력에 버티고 있었는데, 나치스와 결탁한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드러남으로써 더 이상 발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스위스 정부, 탈출한 유태인 독일로 돌려보내

결국 비밀 장부가 공개된 지 2주 만에 은행측은 마지 못해 관련 자료 완전 공개와 휴면 계좌 발굴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야간 경비원 마일리는 직장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조국을 배반했다는 비난과 함께 그의 두 아이를 유괴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스위스 은행의 나치스 협력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 후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

전세계 총자산의 3분의 2 가량을 직·간접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스위스 은행들의 신용뿐만 아니라 알프스의 영세 중립국으로서 국가적 도덕성마저 의심케 하는 나치스 금괴 사건은 어느 이름 없는 미국 작가의 추리 소설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94년 뉴욕에 살고 있는 유태인 이즈라엘 싱어는 2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를 상대로 미국 정보기관이 벌인 첩보전과 당시 바젤의 국제 은행에 근무하던 덜레스(후에 미국 국무장관을 지냄)의 역할을 파헤친 폴 에르트만의 소설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이 다룬 미국 첩보부대의 비밀 작전 ‘세이프 헤이븐’은 나치스가 유럽 각국으로부터 약탈한 금괴를 제3국으로 운반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이 소설에 묘사된 나치스의 금괴 약탈 사건과 미국 첩보부대의 공작 내용을 보면서, 유태교 랍비인 싱어는 나치스와 스위스 은행 간의 비밀 거래에 유태인 자산도 포함되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의 친척 1백30여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어린 시절 악몽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릴 수 없다 하더라도, 빼앗긴 재산만은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33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에게 정권을 넘기자 유럽 각지의 유태인 자산가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중립국 스위스에 돈을 맡기고 망명을 시도했는데, 스위스 정부는 천신만고 끝에 사지(死地)를 탈출한 유태인들을 국경에서 체포해 독일로 되돌려 보내는 냉정함을 보였다. 압수한 유태인의 여권에는 독일과의 밀약에 따라 빨간색 도장으로 J(독일어로 유태인인 Jude의 머리 글자)를 찍어 독일 비밀 경찰 게슈타포가 유태인을 검거하는 것을 도왔다.

이런 식으로 처형당한 유태인만도 수만 명에 이른다. 나치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전시 인플레 때문에 독일 화폐를 해외에서 유통시키기가 불가능해지자 스위스 은행을 통해 전시 물자를 사들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스위스 은행은 나치스의 금괴를 유리한 조건으로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
나치스 금괴로 금화 2천만개 주조

전쟁이 끝난 후 스위스 은행들은 나치스에 처형된 유태인 예금주의 상속인들에게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런 식으로 재산을 빼앗긴 유태인 가족 중에서, 브뤼셀에서 스위스 시계를 수입 판매하던 존아벤트의 이야기는 한 실례일 뿐이다. 그는 나치스 침공이 임박하자 가족과 함께 42년 스위스로 망명을 시도했는데, 스위스 거래처가 신원을 보증했는데도 국외로 추방되어 그 해 8월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했다.

전후 그의 딸은 스위스 은행에 아버지가 남겨둔 20만프랑(한국돈 3억원 가량이지만 50년 전의 물가를 생각하면 수백억원의 가치임)을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존아벤트의 옛 거래처들이 계좌가 존재한 사실을 증언하고 대금 이체 사실까지 증명했지만 은행측은 서류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50년이 지난 후 여러 가지 물증이 드러나 스위스 은행의 거짓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하자 백발 노인이 된 존아벤트의 아들은 다른 피해자 1만2천여 명과 함께 2백억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싱어는 미국 연방 문서고를 뒤져 자료를 보강한 다음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유태인협의회 브론프만 의장을 찾아가 유태인 재산 되찾기 운동을 논의하게 된다. 유명한 위스키 회사인 시그램사의 상속인 브론프만은 자신의 재력과 폭넓은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전세계 유태인들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계유태인협의회의 이름으로 소련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의 해외 이주를 성사시킨 사실이나,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고 오스트리아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쿠르트 발트하임의 나치스 전력을 문제 삼아 대통령 직을 사임케 한 공로는 전세계 유태인들의 신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브론프만과 싱어는 우선 스위스 은행들에게 나치스에 희생당한 유태인들이 개설했던 예금을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스위스 은행측은 비공개를 조건으로 하여 95년 9월12일 1차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협상이 실패하자 협상 당사자들은 언론과 정부기관 등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브론프만 일행은 뉴욕 주 상원의원인 다마토를 만나 유태인 계좌 문제를 상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연루된 화이트게이트 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해 명망을 얻은 공화당 소속 다마토는 미국 의회에 이 사건에 관한 청문회 소집을 요구하였고, 유태인이 많이 살기로 유명한 뉴욕 주는 스위스 은행의 뉴욕내 영업 금지와 스위스 자산 동결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브론프만은 지난 4월 힐러리 여사 주선으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스위스 은행의 부도덕성을 성토하고 스위스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경제 보복을 건의했다.
스위스 은행의 공식 입장은 결코 유태인 소지 금붙이를 반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과학자들은 스위스가 발행한 20프랑짜리 금화들에서 기준치를 훨씬 웃도는 수은이 함유된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는 금니에서나 찾을 수 있는 수치라고 한다. 스위스는 종전 후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나치스에게서 사들인 금괴를 녹여 무려 2천만개나 되는 금화를 주조했는데,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주조 연도를 전쟁 이전인 36년으로 위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측에 줄을 댄 스위스 은행가들은 연합국측이 나치스 금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자 금괴 수천 t 중 일부만을 서유럽부흥기금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내놓았다. 종전 후에 서유럽에 자본주의 체제를 재건하려고 고심하던 미국은 ‘중립국’ 스위스 은행들의 이용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서독내 나치스 잔당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서방 연합국측은 스위스 은행가들에게도 서유럽 부흥계획에 기여하는 대가로 그들의 과거를 묵인했다.

그 결과 스위스 은행의 비밀 금고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전세계에서 부도덕한 권력의 검은돈이 흘러들어 가는 마지막 종착지로 기능해 왔다. 이는 나치스에 빌붙어 이익을 챙기던 스위스 은행의 과거 행적에 궤도 수정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유럽 언론들은 나치스 금괴 문제가 전후 50년이 지난 이제서야 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배경을 국제 정세 변화에서 찾고 있다. 동서 냉전 중에 스위스가 내세울 수 있었던 중립의 근거가 냉전 붕괴 후 사실상 사라지면서, 특히 미국 의회 청문회 활동이 보여주듯이 스위스의 역사적 치부를 파헤칠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전쟁 도발국이 아니었고 연합국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더욱이 중립국임을 내세우는 국민 의식이 확고하다는 사실 때문에, 숨겨진 역사의 전모가 드러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선망하는 스위스. 이 나라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곧 유럽 전후사의 숨은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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