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북한통 퀴노네스 박사 인터뷰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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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4자 회담을 제안한 취지는 건전했다. 대화를 통해 남북 관계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가 사용한 전략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54)는 지난 10월말 현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북한 및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미국 국무부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였다. 학창 시절 동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담당, 국무부 북한담당관, 그리고 94년부터 최근까지 국무부 북한분석관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그는 최근 몇년간 활발하게 전개된 미·북한 관계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특히 미군유해발굴단 및 북한핵 재처리시설 전담반의 국무부 대표로서 최근까지 열세 차례 북한을 방문한 그는, 북한 외교부와 인민군 고위 간부들의 사고 방식에 정통한 인물로 손꼽힌다. 지난 7∼8월 두 달 간은 아예 평양에 장기 체류하면서 미·북한 간의 ‘모든 현안’에 대해 북한측과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지난 8∼9일 제네바에서 첫 본회담의 막이 오른 4자 회담 역시 현직에 있을 때 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4자 회담 제안 초기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밝힌 이번 인터뷰는 주로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행정부를 떠나 의회 산하 평화연구소 초빙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지금도 그는 4자 회담에 대한 정책 자문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제 전화 통화에서 그는 “공직에 있었더라면 이런 인터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라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4자 회담은 제안 초기부터 그 배경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미국측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배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4자 회담은 남북 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2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단절된 이래 워싱턴과 서울은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에 다시 나오도록 노력해 왔다. 특히 미국은 고위급 접촉 때마다 북한을 설득했다. 93년 6월의 미·북한 고위급 회담에서는 북한측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대화를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라는 구절을 공동 발표문에 삽입하도록 설득했다. 이듬해 2월 뉴욕에서 허바드 당시 부차관보와 허 종 유엔 주재 북한 차석 대사 사이에 열린 회담에서도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그 결과 94년 3월 판문점에서 남북한 대표가 만났으나 북한측의 불바다 발언으로 대화가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해 정상회담 합의에까지 극적으로 성공했으나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해 또 중단됐다. 그 이후 94년 10월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은 대화 참여를 또다시 약속했는데, 이런 연속선상에서 보면 4자 회담은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또 하나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자 회담을 제안할 당시 한·미 간에 의제나 향후 일정 등에 대해 어떤 논의가 있었나?

한·미 간에는 거의 매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일상적 접촉이 이루어진다. 4자 회담 역시 양국 정부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워싱턴측에서는 국가안보위원회(NSC)와 국무부·국방부 소수 인사들이 토론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실무 차원의 개념 검토말고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를 선언하는 문제가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그의 청와대측 파트너 사이에서 논의됐다. 제안 당시에는 어떤 의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룰지 거의 결정한 바가 없었다. 중국과 북한의 반응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제안을 주도한 것은 한국 정부인가 미국 정부인가?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4자 회담 제안을 주도한 것은 한국 정부이다.

북한이 본회담 참여를 결정하기까지 1년 8개월이 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다고 보는가?

역사적으로 북한은 남북 대화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한반도 문제가 다자간 협상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여 왔다. 이는 김일성이 천명한 ‘조국 통일 10대 강령’의 첫 번째 원칙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이 강령의 첫 조항에서 ‘통일은 외세와의 동맹 관계 및 영향력에서 독립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은 72년의 7·4 공동성명이나 91년 12월의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명기돼 있다. 김일성은 96년 4월16일 <워싱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반도의 미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 외세 의존을 거부해야 한다. 조선 반도는 조선 사람의 것이다. 어떤 외세도 조선 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물론 북한은 언제든지 정책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그토록 일관되게 남북 대화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한 이상 그 원칙을 바꾸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 변화 역시 궁금한 대목이다. 초기에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던 중국이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중국은 오랫동안 남북한이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차이점을 극복하기를 희망해 왔다. 4자 회담 제안 초기에 중국은 한국측의 협의 요청을 지연시키면서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미루어 왔는데, 이는 평양이 어떤 식으로 입장을 정리할지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지도부의 내부적 입장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의 회담 참여 결정이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양이 설명회 참가를 결정한 이후 중국의 태도가 ‘적극’쪽으로 변한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중국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미국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 대화가 재개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점에서도 입장이 같다.

4자 회담은 설명회 단계, 예비 접촉 단계, 본회담 단계로 순차적으로 발전해 왔다. 미국은 4자 회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미국 정부 역시 남북한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4자 회담을 제안한 진정한 의미는 남북의 대표가 한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1년 전만 해도 한반도 정세는 북한 잠수함 사건으로 인해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평양은 서울측에 유감을 표명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이런 모습은 그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94년 3월 대화가 단절된 이래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의 고위 인사와 실무자들이 뉴욕에서 4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몇 차례 회담했다. 다시 말해 4자 회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울과 평양의 관리들이 얼굴을 맞대고 한자리에 앉는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서울과 평양의 대표들이 어떤 결론을 도출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심사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4자 회담 본회담이 열리기에 이르렀는데, 한국 정부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나?

개인적으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전략이 몇 가지 복합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그가 4자 회담을 제안한 취지는 건전했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통해 남북 관계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한을 회담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가 사용한 전략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한국의 동맹국들, 특히 미국과 일본이 남북 문제에 관한 한 그의 리더십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평양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북 식량 지원을 둘러싸고 워싱턴 및 도쿄와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임으로써 평양측에 모종의 확신을 심어 주었고, 북경으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게 했다. 또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불화를 빚기도 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 유지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였다. 또 지난 여름부터는 북한의 붕괴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4자 회담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식량 지원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관료들이 미국 관료들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도록 방치했다. 이런 사례들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다. 그 이후 그의 관심은 국내 정치 문제들로 인해 분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남북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한국에 새 정권이 등장한다면 4자 회담이 어떻게 되리라고 보는가?

누가 되든 남북 대화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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