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우주인’ 존 글렌의 끝없는 도전정신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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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 우주인 존 글렌, 77세에 두 번째 도전…노화 방지 실험 대상 자청
한국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53년 어느날. F9F 팬더 전투기를 몰던 한 베테랑 미군 조종사가 포항에 집결한 북한 인민군을 공습하러 나섰다가 위태한 지경에 빠졌다. 그가 몰던 전투기가 인민군이 쏜 대공포화를 맞고 날개와 동체 부분에 무려 2백 군데나 구멍이 났기 때문이다. 이 조종사는 편대장에게 편대에서 이탈해 비상 착륙해야겠다는 긴급 신호를 보냈다. 당시 서른두 살이던 그는 추락 직전 아슬아슬하게 착륙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서 무려 1백49회 출격 기록을 세울 정도로 빼어난 베테랑 조종사였지만, 그 때만큼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그 조종사는 다름 아닌 존 글렌(77) 상원의원이다. 4선인 그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은퇴할 예정이다. 물론 많은 미국인이 그를 정치가로서보다는 우주인으로 더 잘 기억한다. 소련이 57년 10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고 61년 4월 역사상 처음으로 유리 가가린이 탄 보스토크 1호를 지구 궤도권에 진입시키자 미국민의 자존심은 짓밟힐 대로 짓밟혔다. 50년대 후반 불붙기 시작한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소련보다 한참 뒤진 것이 아니냐는 자괴감이 팽배하던 때였다.

이를 단숨에 설욕하기라도 하듯, 글렌을 태운 우주선 ‘프렌드십 7호’가 62년 2월20일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발사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환호했다. 그가 잃어버렸던 미국인의 자존심을 되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약 5시간에 걸친 지구 궤도 선회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 글렌에게 특별공로훈장으로 답례했다.

의료 기구 몸에 붙이고 9일 동안 우주 생활

그로부터 36년이 흐른 지금 글렌이 10월29일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또다시 우주로 간다. 이번 목적은 처음 우주 비행에 나설 때와는 다르다. 그의 임무는 ‘노화와 무중력 상태와의 관계’를 규명해 노화 현상을 연구하는 실험이다. 현재 미국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3천4백만명이나 된다. 글렌은 우주에서 자신과 같은 노인이 무중력 상태에 놓였을 때의 신체 변화를 관찰하면 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우주에 기꺼이 내던진 것이다. 이번 비행에는 그말고도 일본과 스페인 국적 우주 비행사 6명이 참여해 9일간 우주에서 함께 머무를 예정이다.

글렌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그의 우주 비행이 무리가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정밀 신체검사를 한 결과, 그는 실제 나이보다 무려 서른 살 정도나 젊은 체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입증하듯, 그는 지난 여름부터 플로리다 주에 있는 케네디 우주센터에 입소해 무중력 상태 적응 훈련을 받아왔다. 지난 7일에는 모형 우주선을 이용해 우주선이 지구에 귀환하다가 지표면에 강하게 충돌하는 사고에 대비한 강훈련도 받았다.

글렌은 우주에 있는 동안 각종 실험 장치를 몸에 붙이고 생활하게 된다. 그는 우주선이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순간 카테터라는 의료 기구를 팔뚝 동맥에 꽂고 다목적 실험용으로 쓰일 피를 뽑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또 웃통과 목부분에는 전극 감지 장치를 20여 개 부착해 수면 상태를 기록하게 된다. 그밖에도 그는 체온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무선 송신기가 부착된 작은 온도계를 삼켜야 한다. 말하자면 그는 9일 간의 우주 생활 동안 완벽하게 ‘실험용 쥐‘ 신세가 되는 셈이다.

무중력 상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이를 불문하고 정상인이 일단 우주 공간에 들어갔다 오면 신체 변화를 많이 겪는다. 무중력 상태에 가장 크게 영향받는 것은 신경 계통과 인지 기능이다. 밑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없어지면서 뇌·무릎 관절·연골 조직·척추·눈 등 몸 곳곳에 이상 징후가 잡힌다는 것이다.

우주인이 겪게 되는 또 다른 신체 변화는 몸안의 각종 ‘액체’에서 일어난다. 우선 무중력 상태가 되면 목 주변의 혈관이 부풀어오르며 얼굴이 붓는다고 한다. 게다가 중력의 영향으로 다리 쪽에 몰렸던 피가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면 몸 전체로 퍼지기 때문에 혈압에 이상 증세가 일어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인의 다리 쪽에 몰려 있던 피가 중력 상태에 있을 때보다 약 1ℓ가 빠져나가면서 다리가 홀쭉해졌다.

무중력 상태가 신체에 미칠 또 다른 영향은 각종 장기와 근육, 그리고 뼈 부분이다. 무중력 상태로 여행하는 동안은 척추가 압력을 받지 않으므로 평균 5㎝ 정도 키가 커지는 느낌을 받는다. 또 허파와 심장 기관이 커지고, 갈비뼈는 밖으로 늘어난다. 91년 우주 여행을 했던 앤드루 개프니 씨가 ‘마치 장기들이 둥둥 떠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 것도 그래서이다. 근육 조직도 변하기 쉽고, 뼈 에서 칼슘이 빠져나가 몸이 푸석푸석해진다고 한다. 이밖에도 우주인들은 수면 조절이 잘 안되고 면역 체계가 약해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수면 부족과 면역 결핍 증세 등은 우주인이나 노인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들이다. 무중력 상태에서의 미묘한 신체 변화, 특히 이같은 변화가 인간의 노화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규명하러 가는 것이 글렌의 임무이다.

10월29일 우주선 발사… 미국 언론 난리 법석

흥미로운 사실은 이번 우주 여행이 항공우주국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글렌 자신이 강력히 ‘로비’해 성사되었다는 점이다. 95년 당시 상원의 노화연구특별위원회 소속이던 글렌은 우주에 관한 책을 들추어 보다가 무중력 상태를 겪은 우주인의 신체에서 최소 50가지 이상의 변화가 발견되었다는 대목을 보고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다시 한번 우주선을 타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우주인이 겪는 혈압과 심장 혈관 변화, 균형 감각 상실, 뼈의 연성화, 수면 조절 실패 등등 많은 증세가 지상의 모든 인간이 늙어가며 겪는 증세와 비슷하다는 데 관심이 갔다. 그는 최근 <타임>과의 회견에서 ‘나 같은 노인이 우주로 가 신체 변화를 알아낼 수 있다면 노화 현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글렌은 우선 항공우주국 의사들에게 자신을 노화 연구를 위한 실험용으로 삼아 우주선을 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별로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국립노화연구소를 찾았다. 끈질기게 설득하자 연구소측은 그의 순수한 목적에 일단 동의했다. 96년 여름, 자신감을 얻은 그는 항공우주국의 골든 국장을 찾았다. 그러나 골든 국장은 선뜻 수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글렌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사와 과학자 들로 하여금 일단 가능 여부에 대해 검토하게 했다. 그로부터 6개월쯤 지난 98년 1월15일, 상원 집무실에 있던 글렌은 골든 국장으로부터 ‘OK’ 전화를 받았다.

오하이오의 한 시골 마을에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난 글렌은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의 인생 항로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43년,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변신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전투기를 자기 몸에 찰싹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잘 몰아 ‘미스터 매그넷(지남철)’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그가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글렌은 64년 우주인 삶을 뒤로 한 채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때는 로열 크라운 콜라 사의 중역을 지냈다. 74년 출신 지역인 오하이오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해 정계에 진출했다. 그 뒤로 24년째 상원의원 자리를 지켜오면서도, 꿈 하나는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우주에 가고 싶다는 꿈. 그의 피는 역시 우주인이지 정치인은 아니었던가 보다.

글렌의 역사적인 우주 비행을 앞두고 미국 언론은 난리 법석이다. 현재 주요 방송이 대대적인 특집 프로를 마련 중이고, <타임>과 <라이프> 등은 커버 스토리를 준비하고 있다. CNN은 왕년의 전설적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를 불러내 글렌을 태운 우주선 발사 실황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근래 클린턴 대통령의 성 추문 사건으로 즐거운 일이 없던 차에 미국인들은 글렌의 우주 비행 소식에 모처럼 함박 웃음을 되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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