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메이커 다케시타 일본 정치 ‘쥐락펴락’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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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부터 실질적 지도자…‘고붕’ 7명 여야 수뇌부에 포진
다케시타가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리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9년 전 일이다. 권좌에서 밀려나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날 파티가 대성황을 이룬 연유는 어디에 있는가. 발기인 대표로 인사말을 한 나카소네의 해석을 들어 보자. “다케시타 선생은 일본의 새로운 정치 수법을 역사에 남긴 사람이다. 남을 헤아리고 추스르는 마음 씀씀이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책도, 국회 대책도, 대외 관계도 그런 철학을 축으로 하여 결실을 맺어 가는 정치이다. 그것이 먼 길인 것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가장 가까운 길이다.” 나카소네는 이어 옛 다케시타파 출신이 정계 곳곳에 포진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다케시타 선생은 다케시타 스쿨의 원조·교조로서 군림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다케시타의 엄호 사격으로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의 인사말도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나는 좋은 정책이라면 반드시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미야자와가 말하면 국회를 통과하기가 어려운 문제도 다케시타가 말하면 일사천리였다. 어제는 불가능한 문제가 오늘은 가능해지기도 하고. 이 사람하고 겨루면 도대체 승산이 없다.”

다케시타의 처세술은 ‘인내’

나카소네와 미야자와는 모두 명문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관료 생활을 거친 일본 정계의 정책통이다. 반면 다케시타는 사립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마네 현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시골형 정치가이다. 그럼에도 나카소네나 미야자와가 정치술이나 정책 면에서 다케시타에게 이길 수 없었다는 점을 공개석상에서 스스럼없이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케시타의 처세훈은 ‘인내, 인내, 또 인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처세훈처럼 다케시타는 좀처럼 남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시시껄렁한 얘기라도 남의 얘기를 끝까지 듣는다고 한다. 그는 상대방이 얘기하는 도중에는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 않고 ‘아, 그래’‘과연’‘정말’‘그것 참’과 같은 네 단어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치 평론가들은 이같은 처세술이 다케시타의 인맥을 한없이 넓힌 계기가 되었다고 풀이한다.

올해 일흔네 살인 다케시타는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뒤 시마네 현 고향 마을에서 교편을 잡다가 시마네 현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58년에 금배지를 달고 사토파에 소속되었다. 사토파가 후쿠다파와 다나카파로 갈라지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쪽으로 갔다.

그러나 오야붕 다나카가 좀처럼 권력을 물려줄 낌새를 보이지 않자 다케시타는 85년 다나카에게 반기를 들고 자기 파벌인 창정회를 출범시켰다. 이때 다케시타를 적극 옹립한 고붕 7명에 바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 하타 쓰토무(羽田孜) 전 총리,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자유당 당수,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현 총리가 들어 있다.

오부치 정권은 다케시타의 ‘로봇 내각’

이때의 다케시타파 출신들이 여야에 고루 포진하고 있는데다, 고붕 7명 가운데 하시모토에 이어 오부치가 총리 자리에 오름으로써 다케시타의 정치력은 반석처럼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부치는 총리가 된 뒤에도 정치 대부인 다케시타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정국 운영을 자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부치 정권은 다케시타가 원격 조종하는 ‘로봇 내각’이라는 험담을 듣고 있으며,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하여 ‘다케부치 내각’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다케시타의 인맥은 자민당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사회당 출신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에 참석할 때 일이다. 다케시타는 첫 외국 나들이를 불안해 하는 무라야마에게 “나도 해냈는데 당신이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라고 다독거린 것으로 전해진다.

다케시타와 무라야마는 생일이 겨우 닷새 차이 나는 동년배로서 각자 자민당과 사회당 국회 대책위원장을 지내면서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케시타는 은퇴한 사회당 의원의 취직 자리를 알선해 줄 정도로 여야를 막론하고 한 번 사귄 사람은 끝까지 뒷바라지하는 의리의 사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카소네가 5년 임기 동안에 야당의 반대로 관철하지 못했던 소비세제를 다케시타는 총리 재임중 간단히 도입하는 수완을 보였다.

다케시타 정치력의 원천은 폭넓은 인맥 외에도 풍부한 정보량에 있다. 다음은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간사장 대리가 최근 한 신문에 털어놓은 일화이다.
‘한 10년 전 다케시타 씨 집에 놀러가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갖고 있는 수첩에 국회의원·관료 들의 이름과 생일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히 적혀 있었다. 다케시타가 그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증거로, 나중에 중국 음식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함께 있던 다른 국회의원과의 나이 차이를 정확히 지적했다.’

따지고 보면 하토야마도 이전에는 자민당 다케시타파에 속했던 정치가이다. 하토야마는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뒤 동기생 의원 15명과 인사를 갔더니 다케시타가 “후원회장을 소중히 여기라”“당신은 이렇게 정치 자금을 모아라”는 식으로 한 사람씩 붙들고 성심껏 충고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하토야마에 따르면 다케시타에게 결코 고명한 정치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케시타로부터 자상한 배려를 받은 정치가나 관료들은 자신을 위해 준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어 다케시타에게 푹 빠져든다고 지적한다.

박태준 총재와 절친한 지한파

이러한 인맥을 통해 모여드는 정보의 양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정가의 자질구레한 가십에서부터 신문사 정치부장·경제부장 인사를 제일 먼저 아는 것도 다케시타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할 수 있는 것도 다케시타이다.

다케시타가 리쿠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뒤 거액을 지불하고 우익 단체로부터 금병풍을 구입한 사실이 폭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정보에 밝은 다케시타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 사건을 해결해 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일 의원연맹 회장을 오랫동안 맡아오고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한국을 다녀갔다. 그와 절친한 한국 정치가를 꼽는다면 단연 자민련 박태준 총재이다. 그는 같은 와세다 출신인 박총재가 일본에서 유랑하던 시절 그의 뒤를 봐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도 한때는 다케시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 적이 있었다. 북한은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때 식민지 시대의 배상과 전후 보상으로 50억 달러를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국내 여론이 턱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물꼬를 터준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자민당 부총재를 버리고 대장상을 지낸 다케시타에게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돈줄을 쥐고 있는 대장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가네마루보다는 다케시타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독일 콜 전 총리가 재임 기간에 일본 총리가 열 번이나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나카소네 총리 이후 일본 정치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온 실력자는 다케시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 평론가들은 그를 ‘숨은 총리’ ‘헤어세이(平成)의 킹 메이커’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별다른 정치 철학이 없는 다케시타가, 그것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지 9년이 넘는 이른바 한물 간 정치가가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데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말을 바꾸면 일본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낡은 정치 수법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불만이다. 어느 정치 평론가는 “이런 정치 풍토에서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같은 젊고 박력 있는 지도자가 탄생할 수 없다”라고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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