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주의 유령에 시달리는 호주
  • 캔버라·南相旻(자유 기고가) ()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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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반아시아 감정 부추기며 이민 정책 비판…소도시·농촌에서 큰 지지 얻어
호주에 백호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긴 경제 불황과 실업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 호주 사회 내부에 반(反)이민·반다문화주의·반원주민 여론이 점점 조직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96년 총선에서 존 하워드의 자유당 등 보수 연립 세력이 지난 13년간 아시아 속의 호주가 되려는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간 노동당 정부를 꺾고 집권하게 된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아시아인이 호주인의 직업 빼앗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던 백호주의가 정치적으로 공식화한 데에는 폴린 핸슨 하원의원과 그가 만든 한나라당(One Nation Party)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작은 간이 식당 여주인에서 백호주의를 들고 나와 퀸즐랜드 옥스리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핸슨은, 정치 신인의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 전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이민자가 호주인의 직업을 빼앗고 있고,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후에는 ‘호주가 아시아인으로 뒤덮일 것이기 때문에’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가 ‘호주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고 있고, 부패한 정치인 대신 서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으므로 결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핸슨은 ‘아시아 이민자들이 호주 땅에 간염과 결핵 따위를 퍼뜨리고’있으며, 마약과 범죄를 들여오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이민자와 이민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또한 원주민인 애보리지에 대한 사회보장 정책은 특혜를 주는 차별 정책이므로, 이를 철폐해 호주의 평등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한나라당 장례식 치르자” 아시아계 반발

이런 논리에 대한 대중의 호응과 비난은 서로 만만치 않다. 지난 6월12일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주 아들레이드에서 열린 지지자 집회에서 ‘애국자 폴린과 그의 애국 동지들…’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단상에 선 그는 짧은 연설에서 80여 차례나 ‘호주’와 ‘호주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오직 한 가지 모습의 호주인을 위한 정책’을 부르짖었다. 이같은 핸슨의 주장으로 그곳에 모인 6백여 지지자들의 열기가 뜨거워지는 동안 집회장 밖에서는 인종 차별과 핸슨을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했다. 유리창에는 계란이 터져 흘러내렸다. 열정적 환호와 격렬한 몸싸움이 부딪치는 이런 모습은 지난 5월 이후 핸슨이 전국 순회 집회를 벌이는 곳마다 계속되고 있다.

핸슨이 당선되자마자 인종주의적 흐름을 우려한 아시아계 이민자와 원주민 들은 연대 집회를 열어 인종 차별주의를 규탄했고, 얼마 전에는 인권·사회 단체들이 연대해 핸슨에 맞대응하는 전국 순회 집회 ‘정의를 위한 여행’을 진행했다. 그리고 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호주 중국인 협회’는 모든 중국계 호주인들이 한나라당에 가입하라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중국인 등 아시아인이 ‘한나라당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여 한나라당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핸슨을 그의 간이 식당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당 가입 신청을 인종적·종교적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차별 행위로서 위법이기 때문에 한나라당도 이들의 가입을 환영한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정부의 인권문제위원회와 인권위원회 같은 관련 기관도 핸슨의 허황된 주장을 반박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짜는 ‘전쟁 상황실’을 마련해 놓았다.

스스로를 자유당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지도자라고 여기고, 88년 총선에서 ‘하나의 호주’를 구호로 사용했던 존 하워드 총리도 최근 들어 핸슨을 비난하고 나섰다. 전임 총리인 노동당의 폴 키팅이 지난해 말 핸슨에 대해 ‘매우 꼴사납고, 성질 잘 내고, 외국인 혐오증에 걸린 고양이 한 마리가 가방에서 나오고 있다’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을 때 하워드는 침묵을 지키며 오히려 사회의 보수적 흐름에서 반사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6월 말 하워드 총리의 영국·미국 방문에 맞추어 호주의 인종·인권 문제가 국제적 관심 사안으로 확대되자, 핸슨을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팽, 미국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인 KKK단 지도자 데이비드 듀크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그는 또 호주의 인종 문제가 핸슨이라는 한 극단주의자의 문제이지 결코 사회의 보편적 현상은 아니라고 변호했다.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지식인·언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는 10%를 넘나들 정도로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핸슨이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창당대회조차 치르지 않고 만든 한나라당은 이미 호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정당이 되었고, 마침내 법적 요건을 다 갖추어 지난 7월1일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당 인정서를 받았다. 한나라당의 전국적 확대는 자유당의 지구당위원장을 하다가 핸슨의 핵심 참모로 들어간 데이비드 올드필드가 주도하고 있는데, 그는 올해 안에 전국에 2백여 지부를 설치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또한 이런 추세라면 다음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상원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대도시보다는 아시아 이민자가 거의 없는 농촌 지역과 작은 도시 지역에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높은 실업률로 나타나는 경제 불황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과, 농촌 지역의 정치적 수준을 반영한다. 하지만 캔버라에 있는 호주문화연구센터 데이비드 히든 소장은 역사적 배경도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분석했다.

1880년대부터 본격화한 백인의 농촌 지역 정착 과정에서 원주민 애보리지에 대한 ‘집단 학살’이 1930년대까지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강력한 억압 정책도 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중국 노동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시작된 백호주의 정책이 73년에야 폐지되어, 아직 농촌 인구의 다수는 백호주의 시대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히든 박사는 이러한 역사 배경 때문에 지금까지 인종주의가 농촌 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핸슨의 지역구가 있는 퀸즐랜드 주가 대표적이다.

아울러 이 지역에 있는 대표적 관광·휴양 도시인 브리스베인과 골드코스트에 일본인 등 외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8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하여 외국인 소유 부동산이 늘어난 것도 반아시아인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호주 국립 대학 아시아 지역학부의 신기현 교수는 이런 심리 현상을 ‘우월성 콤플렉스’라고 설명한다. 아시아에 대한 호주의 경제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느끼는 우월감 상실과, 너무나 쉽게 차지한 땅에 대한 불안감이 콤플렉스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2000년 올림픽의 의미 퇴색도 우려

인종주의 확대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대한 것이다. 북경을 누르고 힘겹게 따낸 시드니가 올림픽 사상 최대 대회를 성사시킬 것으로 호주인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인종주의로 국가 이미지가 악화하면 시드니올림픽이 제대로 빛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다.

호주 사람들은 올림픽 다음 해에 맞을 호주 연방 수립 100주년이, 올림픽을 통해 확인한 국가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영국 총독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올림픽과 연방 수립 100주년은 유럽과의 역사적·정치적 탯줄을 부여잡고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현실을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결국 호주는 이미 정치적·경제적으로 밀접해진 아시아에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호주 사람들에게 인종주의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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