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소 독일에서 '추방'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1998.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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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녹색 연정, 점진적 폐쇄 방침…업계 반발 거세
독일 원자력 업계에 적신호가 울렸다. 사민당·녹색당 연립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할 방침을 굳히고 그 구체적인 내용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0일 공개된 연립 정부 정강에 따르면 슈뢰더 정부는 우선 원자력 업계와 새로운 에너지 정책을 협의하고 이 협상이 실패할 경우 원전 폐쇄를 확정하는 법안을 만든다. 연정의 정강은 또 이 협상을 길어야 1년 안에 끝내는 것으로 못박았다. 따라서 독일 새 정부의 원전 폐쇄 방침은 협상 결과가 어떻든 4년 임기 중에 결판 나게 되었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중단

그린피스를 비롯해서 독일 환경운동 단체는 연립 정부의 이같은 방침을 커다란 성과로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가동하고 있는 원전 19개를 모두 폐쇄하는 시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원전 업계와 협상할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전 폐쇄 시점까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하면 원전 업계를 불필요하게 자극해서 앞으로의 협상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지도 모른다. 실제로 독일 원전 업계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정권 교체 가능성에 대해 어느 이익 단체보다 커다란 불안감을 드러내 왔다. 이 점을 고려하면 “원전을 5년 안에 폐쇄한다던 녹색당이 원전 폐쇄 일정을 20∼30년 지연시키려는 슈뢰더 노선에 굴복했다”라고 비판하는 일부 환경운동 단체의 시각은 성급하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오히려 이번 연립 정부 정강에서 주목할 점은 원전 폐쇄 방침이 비록 점진적인 절차를 거치게끔 되어 있지만, 환경부 장관 트리틴이 강조하듯이 각 단계마다 원전 업계의 입지를 좁히는 치밀한 조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정부는 먼저 원전 업계와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원자력법’을 개정해 원전 업계를 지원하는 조항을 완전히 삭제할 계획이다. 다시 말해 원전 업계가 정부 지원을 기대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법적으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올해 초 콜 정부는 원전 주변 지역 주민들의 환경권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으로 원자력법을 개정한 바 있는데, 연립 정부 정강은 바로 콜 정부의 조처가 무효라고 합의했다. 독일의 권력 교체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슈뢰더 정부는 독일인들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서도 콜 정부와 뚜렷한 선을 그었다. 핵발전에 사용되는 연료봉 1개는 1년 동안에 5만명을 죽게 할 만큼 방사능 폐기물을 방출한다. 사용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 시설은 원전의 1년치 폐기물을 단 하루에 방출한다. 체르노빌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방사능 물질은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독일인 70% 이상이 원자력 발전에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89년에 콜 정부는 지역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재처리 시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콜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재처리를 위탁하고 그곳에서 추출한 플루토늄과 핵폐기물을 돌려받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최종 저장소를 확정할 때까지 핵폐기물을 중간 저장소(니더작센 주 고어레벤 광산)에 임시 보관한다는 방침에 따라 95년부터 해마다 한차례씩 그곳으로 핵폐기물을 옮기는 수송 작업을 벌여 왔다. 반핵 세력은 이같은 핵폐기물 이동이 원전 업계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방사능 누출 사고를 일으킬 위험을 안고 있다며 수송 작업을 끈질기게 방해해 왔다. 콜 정부가 폐기물 이동에 투입한 호송 경찰은 1년에 약 3만명, 수송비는 8백억원에 달했다.

연립 정부 정강은 콜 정부의 이같은 핵폐기물 처리 방침이 실패했으며 이제 더 이상 이같은 정책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못박았다. 슈뢰더 정부가 대안으로 내놓은 방안은 원전 업계가 핵폐기물 중간 저장소를 원자력 발전소 안에 지으라는 것이다. 또 독일 핵폐기물은 독일 내에서 처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사용후 핵연료를 영국·프랑스에 위탁 재처리하는 일도 중단된다. 최종 저장소는 콜 정부가 선정한 고어레벤 광산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2005년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그곳의 지질 조사 작업을 중단하며, 새 후보지를 물색해서 2030년에 완성할 방침이다.

원전 업계가 이같은 대안을 받아들인다면 지난해까지 되풀이된, 내전을 방불케 하던 대규모 핵폐기물 수송 작업은 이제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전 업계는 지금까지 핵폐기물 저장소를 확보하는 작업에만 무려 2조5천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 독일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슈피겔> 최근호에 따르면, 이들은 손실이 예상되는 사안 별로 정부에 보상을 요구할 계획이다. 특히 원전 폐쇄에 대해서는 사유 재산권 침해라는 명분으로 법적인 소송도 고려하고 있다.

문제는 원전 업계가 처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4월부터 독일 전기 업체들은 지역별로 갖고 있던 독점권을 잃었다. 이는 유럽 시장 통합 추세에 맞추어 독일 전력 시장이 개방된 결과인데, 독일의 원전 업계가 독점 가격이나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이익을 보는 시대가 지났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난 몇달 간 치열하게 고객 확보 경쟁을 벌여 온 원전 업체들은 이제 원전 폐쇄를 내걸고 있는 사민·녹색 연립 정부를 앞에 두고 ‘새로운 단합’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 업계가 협상에서 제기할 보상 문제는 원전 폐쇄 시기를 늦추는 거래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연립 정부 정강은 이 협상이 실패하면 아무런 보상 조처 없이 원전 폐쇄 시기를 결정한다고 명시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독일에 35%의 전력을 공급하는 원전을 완전 폐쇄한다는 구상은 ‘적녹 연정’이의 역사적 실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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