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투기 자본, 제 꾀에 넘어가다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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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헤지 펀드 규제하자” 한목소리…미국 태도 변화가 치명적
헤지 펀드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고 있다. 독일 사민·녹색 연정의 오스카 라퐁텐 재무장관은 헤지 펀드의 투자 행위를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일본도 최근 주식 공매(short selling)를 제한하겠다고 나섰다(54∼56쪽 참조). 헤지 펀드에게 가장 결정적인 소식은 미국이 나섰다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과 루빈 재무장관은 헤지 펀드가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주범 가운데 하나라고 지목하고 활동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규제책은 11월 중순 이후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과 G7 정상회담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될 계획이다.

국제 사회는 냉혹하다. 강대국이 철저히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역사적 진실이다. 미국은 그동안 헤지 펀드의 해악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체했다. 전세계 신흥 시장의 국고를 털어 미국의 국부를 불려 주는 일등 공신이 헤지 펀드였기 때문이다.

부메랑 되어 돌아온 ‘아시아 빨아먹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헤지 펀드가 미국에도 손해를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월 대표적인 헤지 펀드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무너지면서 미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헤지 펀드가 파산했는데도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미국 금융 당국은 서둘러 긴급 자금 35억 달러를 수혈해 파산을 막았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은 새로운 논의를 시작했다. 헤지 펀드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8년 후반기 들어서 헤지 펀드가 급격히 몰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세계 금융 시장을 누비며 수익만 쫓는 금융 자본이 헤지 펀드이다. 아시아·남미 같은 신흥 시장은 이들의 주요한 먹이였다. 신흥 시장은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고, 또 거개가 금융 인프라가 허약하다. 신흥 시장은 지난해 후반기부터 헤지 펀드에게 집중적으로 단물을 빨린 뒤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 결과는 헤지 펀드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다. 신흥 시장의 허약한 금융 인프라를 이용한 돈벌이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흥 시장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홍콩·대만 같은 중화권 국가들이다. 지난해 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 중화권 국가들은 헤지 펀드를 규제해야 한다고 외쳤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러한 중화권을 헤지 펀드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홍콩을 무대로 벌어진 헤지 펀드와 중화권 자본의 싸움은 그야말로 전쟁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전쟁의 이면에는 서방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광수 교수 (인천대·통상학부)는 “헤지 펀드가 아시아를 친 데는 서방의 정치적인 음모가 숨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중국이 21세기에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후 줄기차게 나온 위안화 평가 절하설도 서방의 중국 흔들기와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이다. 어쨌든 화교권과의 전쟁에서 헤지 펀드는 일단 후퇴했다. 금융 전쟁에서 패했다는 말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이유는 국제 금융 시장 자체가 헤지 펀드조차 판단할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헤지 펀드의 생명력은 정확한 정보 분석에 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부터 그들이 휘저어 놓은 국제 금융 시장은 이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카지노로 변했다.

이는 헤지 펀드의 제왕 조지 소로스의 최근 행보를 따라가 보면 잘 알 수 있다. 97년에 그는 아시아 통화가 폭락해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무슨 이유인지 엄청난 규모로 손해를 보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패한 곳은 영국이었다. 소로스는 92년과 93년에 영국 파운드화를 무차별 공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바 있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지난 3월 말 영국 파운드화가 급락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3개월 후인 6월 말에 파운드당 2.70 독일 마르크에 팔 수 있는 풋 옵션(put option)으로 파운드를 사들였다. 그 규모는 60억∼80억 달러나 되었다. 그러나 약정 기일이 되어도 파운드화는 여전히 3마르크 선의 강세를 보였다. 소로스는 큰 손해를 보았다.

그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월20일 러시아 정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바람에 그는 20억 달러라는 최악의 손실을 입었다. 러시아에서 손해를 본 것은 소로스 혼자가 아니었다.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서방의 헤지 펀드와 투자가 들은 러시아 채권에 투자했다가 모두 3백30억 달러라는 엄청난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97년 동남아 통화 위기 때 벌어들인 수익을 러시아에서 다 까먹은 것이다.
헤지 펀드 투자자들, 발 빼기 시작

소로스 같은 헤지 펀드들은 영국과 러시아에서 입은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7월부터 홍콩을 공격했다. 그러나 홍콩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홍콩은 98년 7월 말 현재 외환 보유고가 9백65억 달러로 세계 3위였다. 홍콩은 8월14일 이후 보름 동안 1백50억 달러를 쏟아부어 홍콩 달러를 방어했다. 홍콩의 뒤에는 베이징 당국이 버티고 있었다.

더구나 외환 보유고 8백40억 달러로 세계 4위인 대만까지 가세했다. 대만은 헤지 펀드와 홍콩 당국의 전투가 한창이던 8월28일 조지 소로스가 관리하는 모든 펀드의 활동을 금지해 소로스의 손발을 묶었다. 싸움은 홍콩의 승리로 9월 초에 끝났다. 금융산업은 어차피 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이어서 헤지 펀드는 막대한 손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조지 소로스가 실패를 거듭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력으로 금융 환경을 진단하고 투자하는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실패했다는 것은 국제 금융 질서가 이제는 극단적인 혼란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기가 쳐놓은 덫에 투기 자본이 스스로 걸려들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규제책이 필요없다는 의견도 있다. 시장 자체의 논리에 맡기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주장이다. 헤지 펀드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규제 정책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자본 시장에서 내쫓기기 시작했다. 헤지 펀드에 돈을 맡긴 투자자들이 돈을 빼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연말쯤 헤지 펀드에 돈을 맡긴 투자가들이 일제히 돈을 빼가는 사태가 발생하면 각국 정부가 규제하지 않더라도 헤지 펀드는 자멸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우습게도 헤지 펀드들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규제책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지 소로스는 얼마전 헤지 펀드를 규제하고 감시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이거 펀드의 매니저 줄리언 로버트슨도 소로스와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비켜 가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다. 이는 이들이 앞으로 헤지 펀드 방식으로는 살아 남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융은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 정확한 정보를 가장 신속하게 수집하고 이에 근거한 판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헤지 펀드다. 선진국 금융기관에서는 정보를 수집해 판단하는 직원들이 가장 대우받는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 경제 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분석된 정보’가 없다. 금융 전문가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종합해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정보 분석 시스템을 한국에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한 해에도 수십 가지 투자 기법이 개발되는 곳이 국제 자본 시장이다. 한국이 지금 같은 금융 환경과 정보 시스템을 고집한다면 앞으로도 서방 자본의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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