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일로의 유고 사태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5.08.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상군 파견 않고 “공습만이 해결책”…유엔도 공동 보조, 확전 눈앞에
보스니아에는 미군이 없다. 인종·종교·영토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4년째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미국은 ‘제2의 베트남전’이 될까 봐 발을 빼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지난 7월26일 미국 상원이 내전의 한 당사자인 회교계에 대한 지난 4년 간의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파란이 일고 있다. 무기 금수 조처는 91년 유엔이 보스니아 내전의 악화를 막기 위해 시행했던 것이다. 상원이 해제를 요구한 것은, 세르비아계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보스니아 회교 정부군에 무기 금수를 해제함으로써 자위 능력을 높여 주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상원의 이같은 결정은 최근 세르비아계가 유엔 안전지대인 스레브레니차와 제파를 점령한 데 이어, 보스니아 서북부에 있는 또 다른 안전지대인 비하치에 맹공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유엔은 91년 5월 회교계 주민들을 세르비아계의 인종 청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6개 지역에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회교계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구호 활동을 펼쳐 왔다. 문제의 안전지대는 세르비아계가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섬처럼 고립돼 있어 항상 세르비아계의 침략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이곳에 파견돼 있는 유엔 평화유지군은 수가 적고 경무장한 상태라서 세르비아계의 침략 위협을 제어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 이들 지역이 잇따라 함락되고 인종 청소·학살·강간이 다시 자행되자 유엔과 나토가 세르비아계의 공세를 막을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양측이 풍부한 무기를 가지고 엄청난 살육전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보스니아에 파견된 유엔군 병사들은 그만큼 더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미 상원 무기금수 해제 결정으로 새 국면

게다가 주변 국가들이 개입함으로써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지도 모른다. 회교 국가들은 전부터 보스니아 정부를 지원하겠다고 밝혀왔고, 특히 아랍에미리트(AE)는 국영 언론 매체와 이슬람 학자들을 동원해 보스니아 지원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도 최근 보스니아 정부에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보스니아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프랑스(3천8백명)와 영국(3천3백명)이 미국 상원의 결의를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만일 미국 상원의 결의가 실행에 옮겨진다면 유엔평화유지군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내전이 확대되리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클린턴 대통령 역시 이를 의식해 상원의 결의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특이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습을 보스니아 문제를 푸는 유효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클린턴은 상원의 의결 소식을 듣고 “공군력 사용을 늘리는 것만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공세를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럽에 있는 나토 동맹국들의 입장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특히 프랑스는 세르비아계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이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해결책이 못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산악지대인 데다가, 안개가 심해 공습으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는 미국이 보스니아에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보스니아 지역에는 절대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이 인종·종교·영토 문제 때문에 워낙 복잡해서, 지상군을 파견할 경우 자칫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부시 전 대통령 시절부터 지상군 파견 조건을 △유엔 평화유지군이 철수하는 것을 돕거나 △분쟁 당사자 간의 평화협정 이행을 감시할 때로 국한했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은 한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5월31일 클린턴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평화유지군의 재배치를 위해서도 유엔의 요청이 있다면 지상군을 파견할 수 있다고 시사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 발언은 지상군 파견이 가져올 전면 개입의 우려 때문에 백지화하고 말았다.

보스니아에 지상군을 파견하는 대신 공습을 주장하는 미국은, 유엔이 세르비아계에 대해 지나치게 유화적이라고 비판하고, 유엔사무총장이 갖고 있던 공습 결정권을 현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넘겨주라고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미국의 이같은 주장은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선 보스니아 내전을 유럽의 문제로 치부하고 군사적 개입을 꺼려온 미국이 보스니아 문제에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데 대해 유럽 국가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다.

영국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습에 소극적이고, 러시아는 나토가 세르비아계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러시아는 또 보스니아 문제에서 완전히 따돌림 당한 채 미국이 독주하는 양상에 대단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공습 주장은 나토 동맹국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일곱 차례나 세르비아계에 공습을 가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는 점도 유럽의 입장을 강화시켜 준다.

나토 회원국들, 미국 이중 태도에 못마땅

그런데 지난 7월25일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16개국 대사 회담에서는 미국의 주장이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 26일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동쪽의 마지막 남은 안전지대인 고라주데를 공격할 경우 단호하고도 결정적인 응징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습 결정권을 보스니아 주둔 유엔군 총사령관 베르나르 장비에르 장군에게 위임한다고 밝혔다.

그가 공습 결정권을 위임한 것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유엔의 민간 관리들이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습을 꺼리고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비판하고, 이들을 공습 명령체계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은 갈리 총장의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이제 유엔의 이중적 공습 승인 절차를 실질적으로 개선·시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중적 공습 승인 절차란, 보스니아 현지 사령관의 공습 요청을 유엔 최고위층이 승인하도록 되어 있는 명령 체계를 말한다. 지금까지는 유엔 사무총장이나 아카시 야쓰시(明石康) 유고담당 유엔특사가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번 결정으로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습이 한결 쉬워지자 유럽연합 국가들과 캐나다 등은 미국의 공습 확대가 몰고올 위험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차별 공습이 자칫 보스니아내 민간인과 현지 유엔군 병사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다시 확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세르비아계의 잇단 안전지대 점령에 맞서 보스니아 회교 정부는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연합해 세르비아계의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고 있고,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이에 맞서 7월28일 세르비아계 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은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나토 동맹국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보스니아에 평화를 유지하고 명예롭게 철수하는 것이지만, 철수도 평화 유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는 미국은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프랑스와 영국 등 다른 나토 회원국들이 미국을 비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