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북한 노동자 의식조사
  • 모스크바·김종일 통신원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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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북한노동자 4백75명 의식 조사/‘흡수 통일 반대’ 91%, ‘사회주의 옛 소련 재건’ 66%
모스크바로부터 상트 페테르부르크 쪽으로 열차를 타고 3시간쯤 달리면 인구 60만의 전원 도시 트베리 시가 나타난다. 시내 중심부로 들어서면 마믈리노의 대단위 아파트 건설 현장이 눈에 띈다. 1천5백 세대가 입주할 아파트 건설 현장은 최근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으며, 여기에 투입된 해외 노동자들이 ‘외화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는 폴란드나 옛 유고 등 동유럽권 출신은 물론 터키나 독립국가연합 회원국인 투르크멘에서 온 사람도 있다. 중국 노동자도 눈에 띄었다. 북한 노동자 숫자도 꽤 많았다. 북한 노동자들은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군용 수송기로 이곳까지 이송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북한 노동자들 실태는 시베리아의 벌목공들이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 알려졌다. 이들은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나온 보안요원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때문에 외부인은 이들에게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통해 그때그때 러시아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에 관한 정보들이 단편적으로 흘러나왔다. 현재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에 얼마나 파견돼 있는지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시베리아 등 벌목 지역이나 대규모 건설 현장에 적지 않은 북한 노동자가 외화벌이에 동원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말로 인사하자 칼 꺼내 위협

트베리 시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접근은 철저한 보안이 필요했다. 경우에 따라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실제로 어떤 북한 노동자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자 다짜고짜 욕을 해대며 삽을 들고 내리치려 했고, 어떤 노동자는 칼로 위협하기도 했다. 이같은 적대적인 반응 때문에 필자의 설문 조사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냈다. 우선 이들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하는 만큼 필자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러시아 사람들인 모스크바 대학 대학원 경제학부 연구 교수와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필자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트베리 시에서 채용한 한 러시아 여성(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다) 등 5명으로 된 조사팀을 만들어 지난해 9월부터 지난 7월 하순까지 은밀한 방법을 통해 북한 노동자들에게 접근했다. 특히 흥신소에 근무하는 러시아 여성은, 자신의 컴퓨터에 입력된 70여 북한 노동자의 인적 사항을 제공해 이번 조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파트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들이 이곳에 투입된 것은 지난해 5월께였다. 당시 북한 노동자들의 수는 7백명에 달했으나 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면서 최근에는 3백명으로 줄었다. 조사팀은 북한 노동자들이 현장에 투입된 직후 이들의 생활 의식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시작해 총대상 6백명 중 4백75명으로부터 응답을 얻어냈다.
이들이 일하는 곳이 아파트 건설 현장인 만큼 북한 노동자들은 모두 남자였다. 이들은 대부분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결혼한 사람들을 내보낸 것은 이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이들의 나이는 28~45세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직업은 미장공·목수·용접공 등 다양했다.

북한 노동자들을 고정적으로 중개해 온 한 교포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일을 열심히 하는 숙련공이다. 그는 “어떤 용접공은 용접을 마친 뒤 거칠거칠한 용접 표면을 사포로 어찌나 열심히 닦았는지 표면이 매끄럽게 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필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가 손을 보았다는 한 집의 욕실 바닥은 공사가 끝난 지 4개월이 지났는데도 균열이나 퀴퀴한 냄새가 없었다.

월급은 5백~7백달러… 실수입은 70달러

트베리 시 아파트 건설 현장에 투입된 북한 노동자들은 달마다 미화 5백~7백달러를 받는다. 비교적 월급이 높은 편이다. 전체 응답자의 91%가 이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70달러에 불과하다고 한다. 월급 가운데 절반 이상을 북한 정부가 의료보험비·교통비 명목으로 원천 징수해 가는 데다 숙식비까지 제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국에 있을 때보다 월급이 많다고 응답한 사람이 90% 이상에 달해, 이것저것 떼여 별로 남는 것은 없어도 외국에 나와 일하는 것이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의 학력은 기술계와 인문계 전문 학교를 나온 사람이 60%나 돼 비교적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 별로 보면 목수가 24%, 미장공이 31%, 용접공이 9%를 차지했으며 그밖의 건설 업무에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33%에 이르렀다.

결혼하고도 부모와 동거하는 사람이 응답자의 42%인 2백명이나 돼, 북한에서는 남자가 결혼을 해도 부모와 함께 사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결혼해 분가한 경우도 적지 않아 응답자의 37%가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한 노동자들의 경우 부인과의 나이 차는 2~3세가 34%, 4~5세가 47%를 차지했다. 이들은 월평균 5~8회의 부부관계를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39%) 그 이상도 14%에 달했다. 또 부인의 생리가 정상적인지에 대한 질문에 67%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상 생활과 관련해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가게에서 사지 못할 경우 76%가 혈연이나 지연을 통해 구하거나 암시장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 귀순한 북한 동포들에 따르면, 북한 주민은 공산품의 80%, 옥수수의 60%를 암시장을 통해 사들인다. 암시장 가격은 보통 시장 가격의 10배에 이른다.

한때 사회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의 멸망에 대해 응답자 가운데 66%가 언젠가는 사회주의가 재건되리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대답은 전세계적으로 이미 사회주의가 퇴조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오랫동안 주체 사상에 세뇌되어 온 데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 같다.

한국 체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는, 59%가 ‘그렇다’고 대답한 데 반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도 24%여서 묘한 대조를 이뤘다. 한국 체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로는 미국 등 구미 자본주의의 뒷받침을 가장 많이 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응답자 가운데 65%가 ‘북한은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도 23%나 되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이처럼 대답한 사람들은 구미식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있는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회의를 품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91%가 독일식 흡수 통일을 반대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응답자 4백75명 중 1백78명이 동서독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최고위층의 정치적 판단만으로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동독 국민이 경제적으로 핍박 받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앞으로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32%가 러시아와 15개 독립공화국 연합체인 CIS를 꼽았으며 다음으로 중국(29%)을 들었다. 미국(22%)을 꼽은 응답자도 많았으며, 일본은 4%에 그쳐 한반도 통일에 관한 한 별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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