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깃장에 등 돌리는 한·중·일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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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4주년 이후 한반도 정세와 6자회담 전망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측이 6·15 4주년 기념으로 주최한 국제 토론회(6월14~15일) 행사는 따뜻했다. 오랜만에 ‘한반도의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6·15 공동선언이 국내외에서 명예회복 수준이 아니라 칭송을 받았고, 김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답방 약속을 지키라’고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행사장에 나타나 축사를 하고, 리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통해 남북 정상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북과 남이 현재의 좋은 흐름을 계속 끌고 나가 북남관계를 크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김위원장의 메시지에 노대통령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간 협력은 더욱 본격화할 것이며 우리는 그때에 대비해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날 연설 문구를 준비하면서 정부 관계 부처는 표현 하나하나를 놓고 고심했다고 한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이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병행 발전이라는 정부의 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라고 유권 해석을 덧붙인 데서도 고심한 흔적이 드러난다. 핵과 남북관계를 상호 연계한 것에서 남북관계 개선 쪽으로 한 발짝 나아간 것이다.

이 날 하루 동안 남과 북, 그리고 주변 국가에서 온 참석자들이 쏟아낸 말들은 하나하나 음미해 볼 만했다. 서울에서 열린 공개 행사장에서는 처음으로 공개 토론을 벌인 북한측 참석자들의 발언이 특히 주목 대상이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는 데 대한 그들의 불만이나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유라시아까지 이어지는 물류 유통망 측면에서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된 점, 그리고 남북 협력관계가 주변국에도 도움이 된다는 상생의 논리를 적극 개진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전체 참석자 7명 중 4명이 ‘외세 공조보다는 우리 민족끼리 공조하자’, 그리고 이를 위한 실천 과제로 ‘보안법·주적론·상호 비방을 철폐하자’는 똑같은 메시지를 반복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 천금 같은 기회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른 논의들을 개진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현재 남쪽은 북이 ‘연루’되어 있는 핵 문제로 인해 덩달아 고통받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더불어 이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당사자로서,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남쪽의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만했다. 김위원장이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나 고이즈미 총리와 만났을 때 주로 핵 문제를 건의하지 않았던가. ‘우리 민족끼리’ 하자면서 남쪽과 핵 문제를 협의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남쪽 국민과 기업인들은 북한 경제 정책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궁금증이 많다. 특히 2002년 7·1 조처 이후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 공식적인 설명이 거의 없다. 북한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끼리 민족 공조’를 하기 위해서도 서로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이다. 북한은 1991년 한·중 수교 직전 중국이 보인 행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당시 국무원 산하 ‘경제발전 중심’ 소속 전문가들을 대거 한국에 파견해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과 상호 협력 분야를 상세하게 설명했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한·중 경제협력이 깊고 넓게 전개될 수 있었다.

현재의 남북관계, 그리고 6자 회담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는 더 이상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1,2차 6자 회담과 김정일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그리고 5월의 북·일 정상회담 이후 미국과 북한의 역내 외교 입지가 역전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이 애초 의도했던 ‘5 대 1(북한) 구도’가 아니라 ‘1(미국) 대 5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6월23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3차 6자 회담을 코앞에 둔 미국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다.
미국 내의 전문가들은 노골적으로 대북 정책이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략문제 전문가인 이어 브레머 세계정책연구소(WPI) 선임연구원이 지난 6월17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그 한 예일 뿐이다. 그는 ‘진정성이 결여된 미국의 대북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국이나 일본 같은 파트너들이 미국의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며 미국 행정부의 6자 회담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 의회의 초당적 자문기구 ‘미·중 경제안보 재검토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미국이 느끼는 위기감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중국이 ‘무역과 투자, 그리고 평화애호국’이라는 이미지로 아시아 국가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데 비해 미국은 손을 놓고 있음으로써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바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자세에 있는데도 현재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네오콘 일부 세력이 내놓고 있는 처방전은 여전히 구태의연하다. 특히 3차 6자 회담을 앞두고 대세에 역류하는 듯한 태도마저 보이고 있다.

최근 미국은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6자 회담 내 양대 파트너인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 중국은 저우원중(周文重) 외교부 부부장이 고농축 우라늄(HEU)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데 이어 지난 6월11일 리자오싱 외교부장 역시 파월 장관에게 타이완 문제와 6자 회담을 둘러싼 중국의 불만을 강도 높게 전달했다(<시사저널> 765호 참조).

고이즈미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행보 또한 주목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6월8일 G8 회담 기간에 부시 대통령에게 북·미 직접 대화를 원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했다가 면박에 가까운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언론을 동원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지난 6월16일자 일본 언론들은 북·일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부시 대통령과) 목이 마르도록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어 6월18일에도 NHK가 ‘일·조 정상회담의 전모’가 드러났다며 비슷한 내용을 상세하게 전했다.


지난 6·5 행사에 주제 발표자로 참석했던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는 고이즈미 총리의 1,2차 평양 방문 배경에 대해 “제3자가 일본인의 운명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하에 간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과는 생각이 다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고이즈미의 독자 행보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요즘 워싱턴의 네오콘들이 정작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보다도 오히려 중국·일본·한국의 동시적인 이반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냉전의 전사들답게 ‘이라크에서도 밀리고 있는데 동북아에서도 밀리면 안된다’는 처방전을 쓰고 있다. 또다시 강경책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네오콘들이 ‘이번 3차 회담에서 미국은 시늉만 하면서 회담 결렬을 유도하고, 이후 이를 빌미로 북한에 대한 봉쇄 및 제재 제스처를 취하면서, 중국이나 일본·한국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대선 직전인 10월에 4차 회담을 열어 6자 회담 판을 깬다’는 섬뜩한 시나리오까지 흘러나온다.

그러나 대북 정책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는 네오콘들의 이같은 구상이 과연 제대로 먹혀들 수 있을까. 구태의연한 어깃장으로 이미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한 중국·일본·한국을 묶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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