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더의 독일 괴롭힐 콜 시대 유산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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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민-녹색 연정, 콜 정부 실책 떠안아… 전후 보상·나토 확대 등 난제 첩첩
주목되는 승리자:사민-녹색 연정의 외무장관에 지명된 요시카 피셔 녹색당 당수.

‘이번 선거는 동쪽에서.’ 지난 9월 총선을 앞두고 독일 현지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선거 결과가 동독 지역 유권자들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독 유권자들의 선택이 집권 기민당의 참패를 몰고 왔음이 드러났다. 콜 정부는 4년 전 선거에 비해 옛 서독 지역에서 약 1백5만 표, 옛 동독 지역에서 약 80만 표를 잃었다. 동독 지역의 전체 유권자 수가 서독 지역의 3분의 1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쪽의 80만 표는 서쪽의 2백40만 표에 해당한다.

통일 뒤 콜 총리가 해마다 신년사에서 강조한 대목은 동·서독 간의 이질감을 해소한다는 ‘독일 내부의 통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올 신년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동·서 격차를 해소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인한 것일까? 아무튼 동독 주민들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차가운 반응은 콜의 통일 정책이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핵무장 문제도 숙제

선거 분석가들은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하여 독일에 ‘정치적 지각 변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근소한 표차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슈뢰더의 사민당이 압승하고,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사민당-녹색당 연정이라는 좌파 정권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25년 만에 하원에서 제1 정당이 된 사민당은 독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상하 양원에서 다수 세력이 되었다.

의원내각제에서 상하 양원을 동시에 장악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콜 정부가 사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던 상원에서 번번이 거부권 행사에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차기 연정은 집권 초기부터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었다. 녹색당은 83년 처음 원내에 진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탈바꿈한 뒤, 15년 만에 연정 참여라는 파격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동시에 당내에서 대중 지명도가 가장 높은 공동 대변인 요시카 피셔가 차기 연정의 외무장관에 지명되어 국제적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녹색당의 기본 이념이 핵무기 폐기·전쟁 반대·군비 축소인 점에 미루어 콜 정부의 倂?노선이 그대로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중 한 가지는 전후 보상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점령지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전후에 연합군측과 서독 정부는 이같은 범죄를 보상하는 문제를 동·서독 통일 이후로 미루었는데, 여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첫째, 전후 보상 문제는 평화조약을 통해서 해결되는데,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가 없었다. 단일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후 보상 문제는 동·서독이 통일되어 단일 정부가 들어서면 그후 평화협정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것이 서독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런데 서독 정부는 실제로 동·서독이 통일되는 시점이 되자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당시 서독 외무장관이던 겐셔는 회고록에서, 서독이 73년에 유엔에 가입한 이후부터 평화협정은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합국측은 72년에 동·서독이 유엔에 가입한 뒤에도 연합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하는 의무에는 변함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서독 역시 국제조약을 맺을 때마다 이를 확인했던 것이다. 90년에 동·서독과 4개 연합국이 참가해 독일 통일 문제를 협의한 ‘2+4 협상’도 사실은 이같은 국제적 합의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협상의 결과에는 ‘평화조약’이 아니라 ‘독일과 관련된 최종 합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보상 문제는 언급조차되지 않았다. 유럽 각국에서 전후 보상 문제가 2+4 협상 뒤에 제기된 것은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다. 독일 정부는 보상 요구에 대해 ‘보상’이 아닌 ‘인도적인 지원’을 하거나 ‘전후 50년이 지났으므로 더 이상 고려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지난 10월4일 미국 연방의회 의원들은 뉴욕의 독일 총영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슈뢰더 차기 총리가 전후 보상 문제에 관해 새로운 방침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에게 시급히 보상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독일 정부가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전후 보상을 외면한 것은 통일 뒤 국제법적인 의무를 파기한 첫 사례였다.

콜의 외교 정책 실패를 드러내는 두 번째 사례는 독일의 핵무장과 관련되어 있다. 독일 정부는 2+4 협상에서 핵무기는 생산도 보유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독일 정부는 국내에서 이런 약속과 모순되는 선언을 했다. 독일 국회에서 대량 살상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법(1949년 제네바 협정의 부속 문서)을 비준할 때 ‘핵무기는 예외’라는 유보 조항을 붙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핵무기는 국제법의 제한을 받지 않고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콜의 ‘군사력에 의한 세력 확대’ 노선 바뀔까

당시 사민당과 녹색당은, 독일에 핵무기가 없는데 왜 이런 유보 조항을 붙였는지 따졌다. 콜 정부는 ‘나토 동맹국들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였다. 나토 내부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제네바 부속 문서를 비준한 나라가 적지 않다. 독일이 보조를 맞추어야 할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독일 정부가 언젠가 핵무기를 갖게 되리라는 계산에서 이런 유보 조항을 붙였다고 녹색당은 본다. 실제로 독일과 프랑스는 96년 12월에 맺은 안보협정에서 두 나라의 이해가 걸린 지역의 안정을 군사적으로 보장하고,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도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

콜 정부가 2+4 협상 결과를 위반한 또 한 가지 사례는 서방의 군사동맹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93년 나토 확대 문제를 처음 꺼낸 당사자는 독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모두 그 제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나토 확대 방침은 95년 말에 나토의 공식 방침으로 확정되고, 99년 5월 나토 창립 50주년에 맞추어 동유럽 4개국이 가입한다는 일정을 정했다. 물론 ‘2+4 조약’에 나토 확대를 꼭 집어서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90년 독일 통일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보면, 나토가 과거 동독 지역을 넘어서 동유럽으로 확대되는 시나리오는 2+4 협상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다. 첫째, 독일 중립화를 요구하던 소련의 입장을 감안하면, 옛 동독 지역이 나토에 속하게 된 것은 독일로서는 최대치 목표였다. 둘째, 소련은 통일된 독일이 나토에 편입되면 그후 나토가 동유럽으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90년 협상 당시에 갖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은 나토가 동독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고 소련에 확약해 주었고, 특히 미국은 통일된 독일을 통제할 수단은 나토밖에 없다는 언질을 소련에 주었다. 독일이 중립국이 되면 오히려 핵무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소련을 설득한 논리였다.

그런데도 독일이 90년 합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토를 동유럽까지 확대하는 데 앞장선 이유는 바로 미국의 논리를 부정하는 데 있다. 전통적으로 독일의 세력권 지역이던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면 할수록 나토가 독일을 통제하는 기능이 약해지고, 동시에 독일이 유럽 통합을 주도하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논리가 유럽 전체에 군사적 색깔을 짙게 한다는 점이다. 통일 뒤 콜 정부의 외교는 평화의 결실인 전후 보상을 외면하고, 군사력에 의존하는 세력권 확보를 중시해 탈냉전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유산을 남겼다. 이제 독일 정치사에 처음으로 선보인 사민-녹색 연정이 구시대 유산을 청산할 의지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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