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유해 발굴단의 북한 방문기
  • 정리·崔寧宰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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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유해발굴단장’ 퀴노네스 박사 특별 기고/인민군·미군 합동 작업 ‘현장 일기’
미군이 북한에 들어갔다. 그리고 북한 인민군과 함께 공동 작업을 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첫해인 96년에는 미군 9명이 북한에서 20일 동안 작업했다. 97년부터는 미군 숫자가 늘어났고 기간은 더욱 길어졌다.

50년에 미군은 평안북도 운산 근처에서 중공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여 크게 패한 뒤 북한에서 후퇴한 바 있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은 전투에서 숨진 전우의 시체를 버려두고 떠나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53년까지 모두 8천구 가량의 미군 시체가 북한 땅에 버려졌다. 96년 7월에 미군은 조용히 북한으로 돌아갔다. 발굴단은 한국전쟁사에 ‘한국전 실종 미군(MIA:Missing In Action)’이라고 기록된 이들의 유해를 북한과 공동으로 발굴해 그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96년 7월3일 코언 소령, 투아누 상사와 함께 미국 국무부 대표이자 선발대 책임자인 나는 평양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는 휴전 이후 북한 땅에 들어간 최초의 미군으로서 미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협력 관계를 터야만 했다. 평양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한군 장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 두 나라는 아직 전쟁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적군의 대표들이다.”

이틀 밤낮 동안 우리는 북한 인민군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협상했다. 날씨는 매우 더웠고 습기가 많았다. 우리가 묵었던 고봉산 초대소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지치고 신경이 곤두섰다. 마침내 우리는 유해 발굴단이 사용할 음식물과 장비를 북경에서 평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러시아제 IL 76 항공기를 1대당 3만달러에 전세 내기로 합의했다. 또 우리는 지프와 트럭에 쓸 연료 등 유해 송환 계획을 진행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북측과 협상했다.

7월6일, 우리는 어둠에 싸인 평양 공항으로 다시 갔다. 북경에서 우리 짐을 실은 북한군 수송기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오전 1시였다. 공항 터미널 꼭대기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초상화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93년 10월에 김일성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친절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미제국주의 군대’를 데리고 북한 땅에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북한 항공기들이 착륙했다. 모든 비행기에 북한기가 달려 있었고 ‘조선민항공’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화물기 안에서 중국에서 만든 미국 지프 체로키가 굴러 나왔다. 북한 장교들은 중국에서 만든 지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토요타의 랜드 크루저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만약 미군이 북한에서 일본 차량을 이용한다면 미국 의회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 뒤에 일제 이쓰즈 트럭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군 장교는 “그렇다면 일제 트럭은 어떻게 가져왔습니까”라고 물었다. 우리는 진실을 말했다. 중국에는 일제 트럭만 있고 미제 트럭은 없었다고.
농기계·가축도 없이 맨손으로 농사일

그 뒤 우리는 이탈리아제 소형 버스와 중국군 텐트·탁자·의자·침낭·음식물 등을 내렸다. 우리는 20일 동안 북한군 8명을 먹이기 위해 쌀·양배추·양파·칠레 파우더(칠레 고추와 마늘로 만든 양념 가루)·간장·참기름·식용유를 충분히 준비했다. 식수까지 준비했다. 우리는 북한 장교들에게 중국산 물을 8천ℓ나 가져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 장교들은 웃으며 “미국인들은 참 어리석다. 중국산 물을 왜 가져오는가. 북한 물맛이 훨씬 좋은데”라고 말했다.

7월3일은 일요일이었다. 북한 사람들도 일요일에는 일하지 않았다. 북한 세관원은 우리가 가져간 물자에 대해 별 트집을 잡지 않고 검사해 주었다. 우리를 돕는 북한군 20명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매우 빠르고 열심히 트럭에 짐을 실었다. 밤에 그들은 창고에서 잠을 잤다. 물자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해서였다. 7월8일 월요일 아침에 우리가 창고에 들러 보니 그들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더위와 모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안북도 운산에서 북서쪽으로 20㎞ 가량 떨어진 발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운산은 평양에서 차로 3시간30분 걸리는 거리였다.

평양 북쪽으로 뻗은 길. 우리가 지나친 그 길은 50년 11월 미군과 한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에 쫓겨 후퇴할 때 사용했던 그 도로였다. 우리는 청천강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백 명이 청천강가 모래밭과 바위 사이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천강은 과거의 한강처럼 넓고 얕았다. 그러나 한강과 달리 청천강의 모래는 금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손이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서 열심히 금을 찾고 있었다. 안주 바로 북쪽에 위치한, 이전에는 ‘군우리’로 알려졌던 계천시를 지났다. 50년에 미군과 한국군 수천 명이 군우리에서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남쪽으로 탈출하려고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수천명이 군우리 남쪽 평양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묘향산에 도착했다. 그곳은 소나무 향기로 가득찬 시원한 공기와 맑은 강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산악 휴양지였다. 그곳에는 지금은 김정일 것이 된, 김일성이 가장 좋아했던 여름 별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길은 4차선 고속도로였다. 묘향산 관광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여행을 계속했다.

묘향산에서 우리는 서쪽으로 향해 평안북도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가는 곳에서마다 95년 8월의 홍수 때문에 생긴 심각한 피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다리들은 부서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강물 위를 차로 건너야만 했다(사진 ? ). 배수로는 파괴되어 있었다. 들판은 여전히 바위와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가옥 수백 채가 부서지거나 물에 휩쓸려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64년 봄 서울에서 대전으로 여행하면서 그와 같은 ‘완벽한 빈곤’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한국 도로도 포장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차량도 거의 없었고 시골에 있는 집은 대부분 지붕을 초가로 인 흙집이었다.

96년 북한에서 내가 본 광경은 64년의 한국과 거의 비슷했다. 북한의 먼지 나는 도로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 가끔 낡은 트럭이 지나갔다. 목탄을 연료로 때는 트럭도 있었다. 길 위에는 부서지거나 고장난 트럭이 많이 널려 있었다. 수가 아주 적었지만 자전거도 지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모두들 여위었고 남루했다.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들판에는 농기계나 가축이 없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의 손을 이용하고 있었다. 들판의 벼와 옥수수는 키가 아주 작았고 시들어 있었다. 벼와 옥수수도 이곳 사람들처럼 좀더 많은 양분을 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운산에 도착했다. 운산은 2만명이 사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금을 생산하는 유명한 금광이 있었다. 한때는 미국과 영국이 이 금광을 개발했고, 그 뒤에는 일본이 운영했다. 이 도시에서 포장 도로는 중심가의 도로뿐이었다(사진 ? ). 이 도로들은 한국전쟁에서 살아 남은 오랜 석조 건물들 사이로 뻗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저기서 여인네들이 담배와 음식을 파는 모습을 목격했다. 농부들의 작은 가게도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음식물과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금한다. 그런데 운산 시민들은 배고픔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상행위를 하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지방 치안 요원들은 가게와 노점상 들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주민 도움으로 작업 19일 만에 유해 발굴

사람들은 길가에 멈춰 서서 우리가 탄 낯선 트럭들을 주시했다. 우리 트럭들은 인도주의적인 임무를 상징하는 적십자기를 달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깃발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누가 북한 정부가 ‘미제놈’이자 ‘미제국주의 군대’인 미군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 땅 깊숙이 여행하도록 허용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운산 북서쪽에 캠프(사진 ? ? )를 세운 뒤에 우리 일행중 일부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하와이에서 날아오는 본대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7월10일 평양 공항에 도착한 본대는 고도로 숙련된 미군 8명이었다. 이 팀은 인류학·의학·군수품·기계·전기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50년에 운산 전투에서 싸운 미군이 작성했던 지도를 가지고 발굴 지역에 대해 사전에 학습했으므로 당시 미군 부대가 머물렀던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7월11일 미국과 북한의 합동 유해 발굴단은 운산 근처 작업 현장에 도착했다. 북한군 장교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미군이 묻힌 지점을 물어보았다. 지역 주민들이 확인해 준 지점들을 파는 작업을 북한군 8명이 거들었다. 19일이 지난 뒤 마침내 미군 유해들이 나왔다. 유해의 골격은 거의 완벽했다. 심지어 일부는 두개골 위에 머리카락까지 붙어 있었다. 군화와 군복도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유품과 유해를 특별 제작한 슈트케이스로 싸서 판문점으로 운반했다. 96년 7월29일, 전사한 지 46년이 지난 미군 유해는 비무장지대를 통과해서 미합중국 의장대에 넘겨졌다(사진 ? ). 나중에 이 유해는 하와이에 있는 ‘미국 육군 감식연구소’의 치열 기록을 통해 미군으로 확인되었고, 가족들에게도 통지되었다. 유해의 주인공과 가족들에게는 비로소 한국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판문점에서 미군 유해가 묻혀 있는 운산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96년 7월 운산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여러 해 동안 판문점에서 성과 없는 협상을 한 뒤에 미국과 북한의 군 대표들은 96년 1월 하와이에서 만났다. 이 회담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했으나 96년 5월 뉴욕에서 열린 회담에서 북한군은 미군과 함께 미군 유해가 묻힌 지역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는 데 동의했다. 그 뒤 96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추가 회담 때 북한 땅에 처음 들어간 미국 국방부 대표단과 북한 인민군 대표는 96년에 발굴 작업을 세 번 하기로 합의했다(사진 ® ). 각각 20일 동안 미군 10명과 북한인 90명이 운산 근처에서 공동 작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첫 작업 이후 일어난 강릉 지역 잠수함 침투 사건이 나머지 작업을 연기시켜 버렸다.

미군은 즉시 북한 인민군과의 모든 협력을 중지하고 추가 발굴 작업을 ‘잠수함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연기했다. 미국과 북한은 96년 12월이 되어서야 뉴욕에서 이 사건을 풀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매우 어려운 협상을 한 뒤 북한은 마침내 잠수함 사건을 ‘사과’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잠수함 사건이 터진 뒤부터 수습되기까지 미군은 북한과 모든 대화를 중지하고 합동 유해 발굴 작업을 재개하기 위한 일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미군은 이 기간에 북한군과 공동 작업을 하지 않았다. 한국민의 감수성을 배려해서였다. 미군은 전쟁 실종자를 찾는 작업을 인도주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미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반 세기가 지나갔다. 미군은 전사한 병사들을 되찾는 데 기꺼이 많은 시간을 들일 용의가 있다.
북한, 미군에게 전쟁기념관 문서 조사 허용

97년 5월에 미군과 북한군 대표는 뉴욕의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미국 국무부 대표였다. 항상 그랬듯이 협상은 매우 어려웠다. 우리는 사흘 밤낮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북한군은 미국이 합동 작업 과정에서 지불하는 돈을 엄청나게 늘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일괄 타결안을 제시하고 가부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일괄 타결안은 합동 발굴 작업 때마다 10만4천달러를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북한 대표단은 평양의 훈령을 받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 대표단은 마감 시한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흘 뒤에 북한측은 합동 발굴 작업을 세 번 진행하는 데 그때마다 10만4천달러를 지불한다는 데 동의했다. 북한은 또 이 작업을 97년 7월·9월·10월에 평안북도 운산 남서쪽의 작은 마을인 구업리에서 진행한다는 데도 동의했다. 또 북한 대표단은 미국인 5명이 북한에 있는 ‘조국 해방 전쟁 승리 기념관’의 문서를 조사하는 것도 동의했다.

나는 97년 7월11일 첫 번째 선발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97년 7월 어느날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미군 라디오 전문가가 평양 중심부의 고려 호텔 44층 꼭대기에 라디오 안테나를 다는 것을 북한 인민군측이 허용한 것이다. 그 안테나는 우리가 미군 라디오를 이용해 평양에서 2백㎞ 이상 떨어진 운산의 미군과 교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테나 설치 작업을 허용함으로써 북한 인민군과 북한 외교부는 미국을 대단히 신뢰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북한은 한국 땅에 주둔한 미군 부대들이 서로 교신할 때 라디오를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97년에 있었던 세 번의 합동 유해 발굴 작업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운산 근처에서 미군 유해 7구를 발굴해서 판문점을 통해 미군에게 인도했다. 또 8월 첫째 주에 미군 장교 4명과 나는 한 주일 동안 ‘조국 해방 전쟁 승리 기념관’을 조사했다. 우리는 전쟁 때 북한 땅에 추락한 미군 조종사의 인식표를 수도 없이 발견했다. 우리는 이들이 휴대했던 개인 서류를 조사하고 인식표와 서류를 촬영했다. 우리는 또 미군 포로에 관한 정보가 담긴 수많은 전쟁 기록을 조사했다. 컴퓨터를 사용해 소총과 기관총 등 노획한 무기 리스트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슬픈 작업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줄곧 아직도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미군과 남북한 전사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우리는 북한 인민군과 평화롭게 일하면서 신뢰를 쌓고 있었다. 한반도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두 나라 군대는 천천히 같이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전쟁 때문에 생긴 오해와 40여 년 간의 원한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미군이 생활하고 일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는 미군은 인민군 관계자에게 미국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가깝고 충실한 우방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설명할 수 있다.

97년 12월에 미군과 북한 인민군은 다시 한번 뉴욕에서 만났다. 그래서 98년에도 합동 작업을 다섯 번 하기로 합의했다. 이 작업 하나하나는 평화를 앞당기는 작은 발걸음이다. 한 해 동안 진행되는 작업 횟수도 첫 해의 한 번에서 다섯 번까지 점차 늘어났다. 북한군이 또다시 한국을 위협하지 않고 미국의 인도적인 사업에 협력한다면, 평화를 향한 사업 횟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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