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 ‘태극기 휘날리며’
  • 뉴욕·최수진 통신원 ()
  • 승인 2004.07.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욕 교포들, 투표 독려 등 ‘유권자 운동’ 나서…“권익 향상에 절호의 기회”
미국 뉴욕의 한인들이 단결하고 있다. 오는 11월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최대한 활용해 권익 향상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다.

뉴욕은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미국 내 제2의 이민자 도시. 지난 2000년 인구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영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이민자 수가 시민의 절반(4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스페인어 사용자가 2백만명에 육박해 가장 많았고, 중국어(약 32만명), 러시아어(약20만 명), 이탈리아어(약 14만 명) 사용자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어 사용자는 약 12만7천명. 중국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사용 인구를 모두 합쳐도 스페인어 사용자 수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미국 내에서 히스패닉계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제 목소리를 낼 것인가. 답은 하나. 뭉치는 것이다.

뉴욕 시 한인 커뮤니티에는 이미 적지 않은 한인 권익 보호 단체가 생겨 활동 중이다. ‘한인 시민 활동 연대’ ‘청년 학교’ ‘뉴욕 유권자 센터’ ‘한인 권익 신장 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인과 그 외 다른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연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5월, 다른 소수 민족 단체들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계 유권자 연맹’(APAVA)을 결성하고, 공동으로 유권자 등록 운동과 선거 참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이민 1.5세와 2세를 주축으로 결성된 한인 시민 활동 연대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올해를, 지난 4년간 활동의 결실을 맺는 해로 삼고 있다. 매주 일요일 이 단체는 아시아계 이민자 밀집 지역인 퀸즈 플러싱가에서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제목소리를 내려면 무엇보다 투표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다. 미국 주요 언론에 아시아계 미국인이 또 다른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실제 뉴욕의 뉴스 전문 텔레비전 채널 ‘NY1’은 뉴욕 시청 앞에서 열렸던 아태계유권자연맹의 기자회견을 주요 뉴스로 다루면서, 아시아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선을 앞두고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NY1은 뉴욕 지역에서만큼은 ABC·NBC 등 전국 방송 못지 않은 영향력을 지닌 뉴스 전문 채널이다.

한인시민활동연대는 하버드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보스턴 법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베로니카 정 사무총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뉴욕 뉴저지 워싱턴 D.C. 등지에서 수임료를 받지 않고 무료 변론을 맡는 ‘프로 보노’ 변호사로 유명하다. 이민자 가정의 가정 폭력이나 소상인·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을 맡아오고 있다.

이같은 명망 덕분에 그는 뉴욕 한인 사회에서는 정치권 진출이 가장 유력한 인사이기도 하다. 경력 면에서도 지난 2001년 미국 뉴욕 시 역사상 아시아계 출신으로는 처음 시의원에 당선된 중국계 잔 리우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 없다는 평을 듣는다. 뉴욕 한인 사회에서는 이제 한인 출신 중에서도 시 의원이나 하원 의원 정도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청년학교는 한인시민활동연대보다 훨씬 오래 전에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 역시 올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청년학교는 지난 1984년 뉴욕 주 정부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해 지금까지 20년간 뉴욕 한인 사회의 이해를 대변해 왔다. 이 단체도 매주 화·목 요일 아태계유권자연맹의 일원으로 뉴욕 시 브루클린 연방법원 앞에서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청년학교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안은 초기 이민자와 이들의 자녀에 대한 권익 보호 활동. 지난 봄 뉴욕 주 차량국은 사회보장 번호 확인제를 실시해,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아닌 이민자에 대해서는 운전 면허증을 박탈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려 했다. 초기 이민자, 특히 서류 미비자의 상당수가 트럭 운전 등 운송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이민자의 생계를 직접 위협할 수도 있는 조처였다. 이 때 청년학교는 사회보장 번호를 받은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뉴욕 시 맨해튼에 자리 잡은 차량국 앞에서 대대적인 철회 요구 시위를 벌였다. 결국 뉴욕 주 차량국은 당초 방침을 슬그머니 철회하고 말았다.

청년학교는 이 외에도 ‘불법 체류 학생 구제 법안’ 통과 운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2001년 미국 연방 의회에 상정되어 아직 계류되어 있는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 이민자 자녀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소수 이주자 개발·구제 및 교육에 관한 법안’은 머리 글자를 따 ‘드림 법안’으로 부르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이 법안은 신분 문제로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미국 내 수많은 이민자 자녀들에게 꿈의 법안인 것이다.

청년학교는 지난 6월10일, 뉴욕 일원의 이민자 옹호 단체들과 함께 브루클린에서 이 법안이 조속히 통과되기를 촉구하며 시위했다. 당시 연대 시위에서 문유성 청년학교 사무국장은 “이민자 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는 만큼,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같은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라며 법안 통과를 자신했다. 이 법안을 지지하는 연방 상원의원 수가 과반수에 이르고, 또 올해 대선까지 맞물려 있어 어느 때보다 통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이처럼 이민자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은 정치력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뉴욕의 한인 단체도 이 점을 자각하고 있다. 저마다 생업에 바빠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민자 개개인을 공동의 이해에 따라 한데 묶어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이들 단체의 존재는 무게감을 지닌다.

하지만 한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제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힘이 미약한 상태.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코리안 퍼레이드’ 행사가 이를 반증한다. 한인들의 퍼레이드 코스는 맨해튼 브로드웨이를 따라 센트럴 파크에서부터 한인 타운까지다. 반면 아일랜드계나 히스패닉계는 당당하게 뉴욕의 맨해튼 5번가에서 퍼레이드 행사를 한다.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메이씨 백화점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나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 퍼레이드 등 큰 행사는 모두 뉴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맨해튼 5번가에서 열린다.

뉴욕의 한인들은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함께 올해 대선 결과에 ‘아시안 파워’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희구하며 연대 활동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