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칼 꽂고 자살했다?
  • 파리·김제완 통신원 ()
  • 승인 2001.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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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프랑스 주재 이수영 대사 의문사…중앙정보부 '소행' 가능성 제기돼

1987년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때 '리옹의 백정' '나치의 앞잡이'로 불렸던 클라우스바르비를 체포했다. 프랑스인들은 공소 시효가 지났지만 바르비를 처벌하려고 예외적으로 공소 시효를 두지 않는 '반인륜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2000년 1월15일 한국에서는 개혁입법 차원에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통과되었다.이 법에 따라 과거 권위주의정권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내기위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10월17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은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반인륜법과 비교할 만하다.

1972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한국대사 자살 사건은 그동안 재불 한인사회에서 풍설로 떠다니며 의문과 의혹을 키워왔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해야한다는 것이 당시 사건을 지켜보았던 재불 한국인의 생각이다. 특히 이 위원회에 조사 신청을 하는 시한이 특별법에 2000년 12월 말로 규정되어 있어 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1972년 4월21일 오전 6시께, 프랑스 주재한국대사 이수영(李壽榮)씨가 파리 몽테뉴가7번지 대사관저에서 쓰러졌다. 신음하는 그를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연락해, 앰뷸런스로병원에 옮기던 중 이씨는 숨을 거두었다. 한국대사관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다가 곧 자살이라고 수정했다. 로이터통신은 프랑스경찰도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4월24일 전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르몽드>는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사건 발생 4일 뒤인 4월25일 <르 몽드>는 '설명되지 않은 한국대사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취재 정보에 따라 의혹을 짚어나갔다. <르몽드>는 우선 '자살 동기를 사적인 데서 찾을 수있다'며 그가 전처소생 장녀와 부인 사이에 갈등이 심해 고심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이대사가조만간 서울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있었다'며 직무상곤란한 처지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마지막으로 또 다른 소식통을 인용해, 이대사가 '대사관 정보기관과 협조 관계에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자살로 볼 수 없는 여러 의혹과 증거

<르몽드>는 또 같은 날짜기사에서 이대사가 사망하기 전 그를 만났던 동료들이'특별히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증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대사는 '사망 전날까지도 업무가 밀려 야근을 했다'며, 몇시간 후에자살을 결행할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징후가 보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외교관들이 '이대사가 우울증에시달려 왔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4월24일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이 신문은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 <르몽드>에 이 사건이 다시 등장한 것은 7년뒤인 1979년 8월26일이다. 당시 한국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영길 사건'을 보도하면서1972년 터진이대사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다. <르몽드>는 이사건이 한국중앙정보부(KCIA)와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967년 동백림 사건 때파리에서 유학생들을 불법으로 송환해간 일, 1971년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그리고 1972년의 이수영 대사 자살 사건을 들었다.르몽드가 두 차례나 이수영씨의 자살에 중앙정보부가 관련되었다고 지적하는 동안에도 한국 언론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대사의 죽음이 <르몽드>가 의혹을 제기한 대로 중앙정보부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당시 공식 발표처럼 가정불화를 비관한 자살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가려내기 어렵다.

다만 이 사건이 일어났던때의 정황을 되짚어보면 진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72년은 격동의 해였다. 특히 그 해 10월17일 박정희 정권이유신을 선포해 국내 정정이 불안해지자 해외에서 활동하던 외교관들도 동요했다. 당시미국 주재한국대사관 공보관장인 이재현 공사가 미국으로 정치 망명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수영씨는 1953년 판문점휴전회담에서 한국측 대표로 활동하다가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1943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졸업한 이후 해방된 뒤에 입대했기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군 출신과는 색깔이 달랐던 사람이다.이동원 전 외무부장관의 회고록 <오프 더 레코드>에는 박정희와 이수영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씨가 임명되었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박대통령은 '이수영'이라는말을 듣는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안돼!" 하며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이대사가 1964년 5월부터 잠시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언론 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규제하려 하자전언론이 일어나 반대했는데 이때이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박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이같은 배경을 두고 짐작해보면 그의 죽음이 가정 불화에의한 자살이 아닐수 있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이수영씨의 아버지 이익항씨도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1972년 7월3일 서울지검에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그는 이 의뢰서에서 '사인이 가정 불화로 인한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믿어지지않고 풍설에 의하면 타살 혐의가 있다고 하니 당국이 진상을 조사해 규명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서 7월14일 이대사 사인규명 수사가신속히 진행되도록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이 진정서에서 '본인이 시체를 검안한 결과 타살혐의가 짙으니 철저히 처리되도록 편달해 달라'며 검찰에 수사의뢰서를 내게 된 이유를 썼다. 이후 검찰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누구에 의한 타살인지는 끝내 가려지지 않았다.

근 30년간 정확한 사실이밝혀지지 않다 보니 사건 당시 파리에거주했던 한인들은 지금도 이 문제를 놓고 수군거린다. 말이 잘 안되는 부분에는 상상력이 덧칠되기도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시 사건을 지켜본재불 한인 가운데 그가 자살했다고믿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한 한 교포(소르본 대학 박사)는 당시 파리에서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의 동료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가 시신의 등에서 자상(刺傷)을7개 발견했다면서 "한국인은 자살을 하면서 칼을 등에 꽂고 죽는 재주가 있느냐?"라고 물었다.'이외에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일국의 대사가가정 문제로자살하면서 유서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는가 △자살도구로 부엌칼을선택했다는 것은 그의 신분에 비추어자연스럽지 않으며,약물 등 덜 고통스러운 자살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까 △새벽 6시에 일어나부엌에서 칼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나와서 벽에칼을 대고 찔려 죽었다는 것도 어색하다 △최초 목격자로서 이 사건의 열쇠를 쥔 가정부 강옥순이 사건 직후 이수영의부인과 함께미국으로 떠났다가 석달 뒤에 한국으로 귀국한 것도 석연치 않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파리 경시청의 수사 기록과 법의학연구소의 검시 기록 그리고 사건 당시 공관 직원,특파원과 유가족의 증언을 수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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