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 '배후'는 실패한 과거 청산
  • 서상문 (독도찾기운동본부 홍보국장) ()
  • 승인 2001.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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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왕 단죄 않는 등 전범 재판 '느슨'…
'냉전 방파제 야합'으로 우익 준동 길터


한 국가의 극우 세력은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라는 토양에서 자라난다. 일본의 극우파 역사 왜곡 범죄자들이 자행한 일본의 과거사 왜곡 사태는, 전후 일본이 대외 팽창적 제국주의 의식에 대한 자정력을 상실하고, 우경화로 나아간 결과 생겨난 필연적 현상이다. 일본 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는 근본적으로는 '만세일계의 황국'이라는 민족 우월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임나설' 날조, 임진왜란 도발, 근대 이래 아시아 인접국에 대해 감행한 수많은 침략 전쟁은 모두 근세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날조한 근거 없는 민족 우월의식의 표출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의 비극적 화근으로 작용한 이 민족 우월의식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치유되지 못한 채 황국주의자들의 혈관 속을 그대로 흘렀다. 전후 미국이 주도해 추진된 연합국의 극동 국제 군사재판(1946.5.3∼1948.11.12), 일명 '도쿄 재판'이 그 직접 원인이었다. 전승국인 미국이 전범 재판을 포함한 전후 처리를 올바르게 행하여 일본 우경화의 싹이라고 할 민족 우월감을 제도적·타율적으로 제거, 혹은 정화하지 못하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편의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본을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었던 호기를 방기한 셈이다.


도쿄 재판은 A급 전범인 일왕을 전범의 혐의를 벗겨 그대로 국가 권력의 구심점으로 존치시켰다. 이것이 바로 이 재판의 성격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핵심 코드이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전전(戰前) 국가 권력의 수반이자 근대 계급제도의 유산인 귀족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제기했듯이 만주사변·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도발을 용인한 최고 결정권자였음에도 연합국 판사단(사실상 미국)은 전범으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2년 반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피소된 28명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교수형 도조 히데키 등 7명, 종신 금고 16명, 20년 금고 1명, 7년 금고 1명, 기타 3명). 여기서 네 가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일왕의 전쟁책임론이 폐기되어 전범에서 제외된 것은 곧 전쟁 책임자에 대한 진정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즉 A급 전범을 포함해 유죄 판결을 받은 자 전원은 전범의 괴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들 권력의 원천인 일왕을 단죄하지 않고 어떻게 여타 전범에 대한 단죄가 가능할 것이며, 또 전쟁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말하자면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단지 형식 논리에 따라 일왕과 모든 전범을 대신하여 본보기로 단죄된 것일 뿐이다. 일본 정치학의 대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일본은 '정치적 책임을 질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국가'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문제 의식에서였다.


둘째, 전쟁 기간에 전쟁 수행에 대한 권력 행사의 주체와 실상에 눈이 가려 있었던 보통 일본인들은 당연히 전쟁 도발과 패전의 죄과를 A급 전범인 이들 일왕의 하수인들에게 물었고, 같은 일왕의 하수인인 그 외의 B급·C급 전범에 대해서는 오히려 용서와 동정을 보냈다. 그리고 일왕을 치죄하는 데는 보수 우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도 반대했다.


마지막 보루 좌익마저 대외 팽창주의 노선에 합류




1945년 12월, 연합국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일왕과 패전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때 일왕은 살아있는 신, 즉 현인신으로서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패전에 대해서는 후회·비탄·낙담 또는 유감 등의 다소 복합적 정서가 나타났지만, 하루빨리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공통되었다. 바로 이 점이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훗날 정당화·미화하는 극우 세력의 온존을 가능케 한 토양이었다.


과거에 대한 준엄한 자기 반성이 결핍되어 있는 민족에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전쟁에 관해 보여주는 집단적 의식은 대체로 극과 극의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귀결점은 합치된다. 자신들의 국가가 부강해졌을 때 다시 한번 과거 승전시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하는 향수가 되살아나고, 만약 경제 발전이나 국가의 위상이 장기 침체 국면에 빠지게 되어도 역시 좋았던 과거를 그리게 된다.


일본 NHK가 실시한 '일본인 의식 조사'에 따르면, 일본이 일류 대국이라고 의식한 사람이 1973년에 41%였고, 1983년에는 57%로 증가했다. 고도 성장을 이룬 1980년대에 그들은 그것이 냉전 시기 미국의 핵우산 속에서 안보 무임 승차, 또 한국전쟁·월남전의 특수 덕분이었음을 망각하고 물질적 성과를 스스로 대견해 한 것이다. 또한 1986∼1987년, 〈아사히 신분〉이 독자 투고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내용 중 85%가 자신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가해자라고 응답한 자는 겨우 5%에 불과했다.


셋째, 일왕을 단죄함으로써 그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때 일왕폐기론까지 주장했던 좌익까지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 좌익이 누군가? 그들은 전후 '평화헌법'과 반핵 3원칙 고수, '미·일 안보동맹' 반대라는 정치 이념을 표방함으로써 일본의 우경화를 견제하는 저울 추로 자처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은, 일본이 전쟁 발동에 대해서 전세계에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왕의 권위는 인정하고자 했다. 좌익은 1990년대에 들어와 우익에 영합하여 일본의 대외진출 관련 법안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 노선에 합류했다. 좌우익이 국가주의라는 한 배에 탄 것이다.


넷째, 제소된 전범의 숫자나 형량이 타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는 점이다. 1945년 2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즉 일본 전범을 처리한 같은 기간에 미국·호주·영국·네덜란드,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정부, 필리핀·중국(국민당 정부) 등 7개 국가가 B, C급 전범을 9백71명이나 사형에 처한 데 비해 일본의 경우 A급 전범 7명만 사형에 처했다. 이는 모두 미국의 자국 편의주의에 따른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 각계의 골수 파시스트 약 20만 명을 '숙정'했다고 하지만,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미군 점령 구역 전체 인구 1천3백18만여명 가운데 3백44만1천8백명이 기소되어 정식 판결을 받은 자가 전체 인구의 7.2%에 달하는 94만5천 명이나 되었다.


기소된 전범이 총리 되기도


더군다나 전범으로 지목, 기소된 일본인 가운데는 이런저런 이유로 풀려나 정치 권력에 복귀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초대 자민당 당수가 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내각 총리로 등극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대표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것도 미국이 미·소 냉전 심화에 따라 일본을 공산 세력의 확대를 막을 방파제로 삼기 위해 야합한 결과였다. '마루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생체 실험 결과를 입수하기 위해 미국이 관련 연구원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지 않기로 일본과 비밀 협정을 맺은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한 예이다.


비밀 협정이 벌여놓은 틈을 비집고 일본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 호전에 발맞추어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일본 우익은 침략 전쟁에 대한 배상과 사과가 요구되지 않은 점을 뒤집어서 전쟁 정당화를 시도한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하야시 후사오(林房雄)의 '대동아전쟁 긍정론'은 그 후의 역사 왜곡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가이드 라인 구실을 했다.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미의 힘겨루기 시대가 도래하자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패권 장악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 왜곡은 일본이 지난 걸프전에서 달러를 기부하고도 정치·군사 대국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점에 심하게 자극받은 극우 세력이 초조함을 드러낸 현상으로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상전이었던 미국에 대해서도 도전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일본 국민을 포함한 아시아인에게 태평양전쟁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전쟁이라고 호도한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미국이 가해자이고 일본은 피해자였다. 그들의 말대로 정녕 도쿄재판은 전승국에 의한 징벌적 재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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