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낙원'의 일그러진 초상/호주
  • 멜버른·남상민 편집위원 ()
  • 승인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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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100주년 맞은 호주,
마약·도박·불법이민 늘어 골머리…'살기 좋은 나라' 이미지 퇴색


호주는 지난 5월9일 건국 100주년을 맞았다. 겨우 100년 만에 호주는 유엔이 실시하는 각국 삶의 질 조사에서 항상 1∼2위를 다툴 정도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호주 정부에도 고민은 있다. 먹고 살기가 편해서일까. 마약과 도박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호주 사회를 좀먹고 있다. 최근 몇년간 마약과 도박이 만연하고, 이에 따라 사회 불안이 확산되는 추세가 좀처럼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심각한 고민거리는 불법 입국자 급증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외국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호주에는 이민자가 넘쳐난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 문제는 전혀 새로운 고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동·중국·남아시아 출신 보트피플이 대거 호주 해안에 상륙하고 있어 호주는 불법 이민 문제를 방관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시드니 시내에 마약 중독자 위한 '주사실' 등장




먼저 가장 큰 사회적 과제인 마약 문제부터 살펴보자. 최근 시드니에서 제일 번화한 환락가인 킹스 크로스에는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을 안전하게 투약할 수 있는 '안전한 주사실'이 문을 열었다. 이 주사실은 마약, 특히 헤로인 중독자들이 의사의 지도를 받아 법률적 제재를 받지 않고 적정량의 마약을 투약할 수 있는 공간이다. 호주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인 연합교회가 운영하는 이 주사실이 문을 연 것은 호주의 마약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최근 〈호주 의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호주의 마약 중독자는 7만4천명, 15∼54세 인구 1000명 중 7명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두 배 넘게 늘었고 그만큼 범죄 건수도 늘었다. 빅토리아 주의 경우 형무소 수감 죄수의 65%가 마약과 관련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10년 전만 해도 1년에 수 십 명 정도이던 과다 투여 사망자가 지금은 천명 가까운 숫자로 불어났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마약 정책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사망자 문제 해결에 맞추어졌고, 사람들을 먼저 살리기 위해 제시된 방안 중 하나가 주사실을 여는 것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정책이 실시된 것은, 중독자를 법률적인 처벌 대상으로만 인식해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 통계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 교정 시설을 거친 청소년의 사망률이 사회 평균의 10배에 달하고, 사망자의 3분의 1이 출소 후 곧바로 마약에 탐닉하거나 자살한다는 것도 법률적 대응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중독자의 사망률을 줄이거나, 마약 투여에 따른 2차적 범죄와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유연한 정책들을 실시하고 있다. 빅토리아 주의 작은 지방인 포틀랜드의 경우 지난해부터 정부 차원에서 주사 바늘 교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지역 마약 투여자의 90%가 C형 간염 보균자이기 때문에 마약 투약자들이 주사기를 서로 돌려가며 쓰지 않도록 정부가 새 주사기로 교환해 주는 것이다. 캔버라 지역이나 빅토리아 주 등에서는 중독자에게 마약성 진통제인 메타돈을 무료 혹은 싼값에 보급하고 있다.


도박 비용 지출 '세계 최고'




마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도박의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지난해 여름 중국계 여성이 슈퍼마켓에 가다가 뙤약볕 아래 차를 세워두고 동네의 작은 포커 기계 도박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잠이 든 아들을 차안에 둔 채 도박에 빠진 대가는 두 돌이 채 안된 아기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아주 잠시 즐겼다고 느낀(실제로는 두 시간) 동안에 차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동네 곳곳에 간이 도박 시설이 있는 호주의 도박 비용 지출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주 국민이 지난해 도박으로 잃은 돈은 1백30억 호주 달러(8조5천억원)에 이르고, 이는 1인당 평균 9백31 달러(60여만원)에 달한다. 소득이 낮은 지역 주민일수록 더욱 심각한 도박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어디에나 간이 도박장이 있어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도박은 어느새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정책 당국인 주정부가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최근 빅토리아 주 정부는 도박업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도박의 폐해가 심한 지역 다섯 곳을 선정해 이 지역에 있는 포커 기계들을 철거했지만, 도박 매출액은 고작 10% 감소했을 뿐이다. 돈을 딸 수 있다는 환상을 심는 어떤 내용도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도박장 광고 내용을 규제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약과 도박이 내부의 도전이라면, 배를 타고 몰려드는 불법 입국자는 국제 정치의 혼돈이 가져온 외부의 도전이다. 지난해 호주 해역으로 들어오다 적발된 선박 59척에 타고 있던 인원은 3천8백명에 달한다. 이들 불법 입국자는 중국인·터키인·파키스탄인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정치 상황이 불안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쩍 많이 몰려온다. 이들은 요르단의 암만이나 방콕의 브로커 조직과 접촉해 호주로 올 준비를 갖추고, 인도네시아의 남쪽 해안에서 선박을 타고 항해에 나선다.


일단 호주 해역에서 적발된 선박에 탄 사람들은 호주 내에 있는 수용소 여섯 곳에 보내진다. 이에 따른 예산 부담도 만만치 않다. 호주 정부는 불법 입국자를 출국시킬 때까지 1인당 평균 5만 달러씩 경비를 지출한다. 또한 이들을 범법자로 취급해 수용소에 유치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사회적 논란도 커지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들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거주 허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단체뿐만 아니라 말콤 프레이저 전 총리 등 사회 저명 인사들도 이런 주장을 제기해 정책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수용소 내에서도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난민의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올해 초 이민부 장관은 시리아·이란 등 중동 국가를 순방해 협력을 요청하는 동시에 호주로 항해하는 바닷길이 너무나 험난하고, 호주에 운 좋게 도착했더라도 악어에게 물려 죽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비디오 테이프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에도 계속해서 보트피플이 밀려드는 것을 보면 호주 정부의 엄포가 이들의 뱃길을 막는 데 효과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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