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솔제니친 믿는다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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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구상·집필한〈2000년을 함께…〉매진…
러시아인과 유태인 관계 집중 분석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83)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최근 '신역사주의' 개념을 도입한 〈200년을 함께 1797∼1995〉라는 그의 신간 초판이 발간되자마자 매진되어 재판을 찍을 정도로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개인적 삶은 귀국한 지 7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독자는 그를 '저항 문학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소비에트 독재 정권의 수용소 실상을 폭로한 그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1권(연옥)〉 〈암병동〉 〈수용소 군도〉는 러시아 문학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저항 정신의 전통을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정부로부터 탄압받았고, 1974년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해외로 추방되었다.


민중과의 소통 원하는 '은둔자'




스웨덴 학술원은 1970년 솔제니친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소련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봐 수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추방당한 후에야 비로소 노벨상을 받았다. 이때 그의 수상 연설은 영원히 기억될 웅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뒤 그는 미국 버몬트 주의 한적한 곳에 정착해 작품 활동을 해왔다.


역사의 시계는 소련을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변화시켰다. 솔제니친은 1990년 시민권을 되찾았고, 1994년 귀국을 허락받았다. 귀국하기 전 정치가로 변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점쳐졌지만,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자 외부와 단절한 채 모스크바 근교 '트로이체-르이코보'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같은 마을 토박이들조차도, 그가 이 마을에서 산다고 텔레비전에 보도되어 알았다고 할 정도로 솔제니친은 두문불출했다. 또한 초록색 나무 담장과 굳게 잠긴 그의 집 문앞에서 경비원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솔제니친 부부가 자주 다니는 곳은 '볼보' 마을이며, 그는 전국을 기차로 여행하면서 민중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라고 집사는 말한다.


솔제니친이 귀국하자 모스크바 시는 트로이체-르이코보 부지를 내주었다. 당시 이곳은 버스도 운행되지 않고 가스도 공급되지 않는, 하층민이 거주하던 외진 마을이었다. 레닌도 1922년 한때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교외로 더 나가면 러시아 엘리트들의 영지가 있다. 현 총리인 카시야노프의 집도 있고, 스탈린 시절 유력 인사들의 다차(여름 휴양지)도 많다.


처음 얼마간 솔제니친은 모스크바 강변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머무르다가, 트로이체-르이코보 마을에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을 신축하고 옮겨와 생활하고 있다. 이 집은 미국 버몬트 주에 있던 집의 복사판이라고 한다. 특히 지하실은 그의 저작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소음이 차단된 집필 공간이다. 그의 생활을 잘 안다는 문학 비평가 나탈리야 젤노로바는 "현재 솔제니친은 꽉 눌린 강철 용수철과 같다. 그는 6시에 일어나 시간에 쫓기면서 살고 있다. 서신 답장, 잡지 읽기, 칼럼 쓰기로 바쁘게 살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간 솔제니친의 작품은 별반 주목되지 못했다. 몇 편의 콩트와 두세 편 정도의 저널류 수필을 발표했을 뿐이다. 1970년대부터 귀국할 때까지 러시아의 국가적·사회적·민족적·도덕적·일상적 과정과 미래에 대한 평가를 담은 〈붕괴 속의 러시아〉(1998년)에 실린 글들도 과거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그 해 12월 솔제니친은 80회 생일을 맞았다.


생일에 즈음하여 비평가들은 그의 문학과 삶을 평가했다. 시사 주간지 〈아르구멘트 이 확트〉 (논쟁과 사실)에서 나탈리야 젤노로바는 솔제니친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는 전장(戰場)의 한 사람'이라고 평했고, 유명한 문학 이론가인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는 '솔제니친이 없었다면, 변화의 움직임은 어느 방향으론가 더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러시아 민중의 운명에 대한 솔제니친의 집요한 관심과 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더불어 문학 연구가들은 귀국 후 솔제니친의 어조 변화에 주목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행보를 주시해 왔다.


솔제니친, 반유태주의자로 매도돼




서방 비평가들은 솔제니친을 반(反)유태주의자이며 범(汎)슬라브주의자라고 몰아세운다. 솔제니친은 1985년 미국 상원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의 저서 〈1914년 8월〉과 반유태주의에 대해 피력했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혹평한 일이 있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전형적이었다. 그 누구도 작품을 읽지 않았다. 대신 한두 전문가 의견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소련에서 〈1914년 8월〉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반(反)애국주의자라고 매도한 것과 똑같았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반유태주의 혐의를 받았다. 대통령에 당선한 푸틴은 2000년 9월 부인과 함께 솔제니친의 집을 방문해 3시간 정도 담소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솔제니친이 생애 최초로 정권과 화해한 셈이다. 푸틴과 만난 뒤 그는 다시금 반유태주의자로 몰렸다. 경제 부총리를 지낸 추바이스가 유태계 재벌인 구신스키와 베레조프스키를 탄압한 푸틴의 결정에 솔제니친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소설이 아닌 논픽션 학술 서적인 〈200년을 함께 1795∼1995〉는 러시아에서 러시아인과 유태인이 맺고 있는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솔제니친이 한 주제에 대해 10년이 넘게 구상하고 집필한 결실로서 '러시아인과 유태인'이라는 이슈에 대한 최종 대답과 결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자료 수집과 정리는 그의 부인 나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그의 세 아들 중 한 아들이 돕고 있다. 솔제니친은 미국에 머무를 때, 그의 작품 주제에 관한 자료를 많이 수집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삿짐이 400 큐빅(1큐빅=1㎥)에 이르렀고, 그 중 대부분이 자료였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평생을 단련해온 그의 사상은 이 방대한 저술을 통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약 20년 간 해외 추방 생활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솔제니친은 변화한 러시아의 현실과도 화해할 수가 없었다. 옐친 정권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러시아는 부패의 천국처럼 여겨졌다. 그는 공공연히 '옐친 배후의 실세'들을 비난했다. 세상이 '실세'를 유태계 올리가르흐(신흥 재벌)로 받아들여 정치 음모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솔제니친은 사회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수용소 군도〉의 원고료를 모두 자신이 설립한 '러시아 사회기금' 재단에 기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호품과 돈이 톰스크·백러시아 등의 억압받는 노인과 어린이 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반체제 인사의 대명사로 꼽혔던 솔제니친의 조용한 변신은 그의 사상이 성숙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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