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혼'의 상징 야스쿠니의 정체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1.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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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이후 '군국주의 전위' 노릇
'총리 참배→헌법 개정→군사 대국화' 가능성


지난 7월19일 오후.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경내는 단체 관광객 서너 팀과 행사를 준비하는 인부들의 모습만 눈에 띌 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폭풍 전야의 정적이라고 할까.


앞으로 2주일 뒤면 이 고요한 신사에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함께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겠다는 뜻을 아직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야스쿠니 신사가 무엇이기에 한국·중국과 외교 마찰을 각오하면서까지 고이즈미 총리가 16년 만에 공식 참배를 강행하려는 것일까. 왜 일본 국내에서는 공식 참배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가.




되살아나는 망령 : 일본 토속 신앙에서 출발한 야스쿠니 신사(오른쪽)가 일본 군국주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라는 책을 쓴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전래의 토속 신앙이던 위령(慰靈) 신앙에서 말미암았다. 이는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역병을 비롯한 재해를 부르기 때문에 영혼을 진정시키려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는 믿음이다.


에도 바쿠후(幕府) 정부를 무너뜨리고 1868년에 등장한 메이지 정부도 이 위령 신앙에 입각해 메이지 유신 전후의 내란 때 사망한 정부군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메이지 2년(1870년)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도쿄 초혼사(招魂社)를 지었다. 오에 시노부에 따르면, 피아를 불문하고 전몰자를 함께 제사하는 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도쿄 초혼사에서 제사할 대상을 메이지 순난자(殉難者), 즉 메이지 왕을 위해 사망한 전몰자로 한정하고, 패배한 바쿠후군 전몰자는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와 함께 정치 이념의 기본으로서 제정(祭政) 일치를 내걸고 토속 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지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발동했다.


〈일본종교사전〉이라는 책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는 신사 약 17만 개가 존재했다. 각 지역에는 외부에서 전파된 불교·도교·유교의 영향을 받아 불상을 모시는 신사, 조선과 중국에서 건너온 신을 모시는 신사, 위령 신앙계의 신사, 산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 등 여러 형태가 존재했다. 특히 6세기께 전파된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불교에 신도를 가미한 이른바 '신불 사상'이 형성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 국교화 조처의 첫 번째 순서로 유신 직후인 1868년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천황의 종교적 권위와 신도를 기본으로 한 국가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전국의 17만 신사에 공적 성격을 부여하고, 일왕의 조상인 아마테라우스 오미가미를 모시는 이세(伊勢) 신궁을 전국 신사의 총본당으로 지정했다. 메이지 정부는 또 신사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 지정해 일반 종교와 분리하고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 달라는 신도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1882년 제사와 종교를 분리한 국가 신도를 확립했다.


일왕가의 '신궁' 다음 가는 지위 지녀




도쿄 초혼사가 야스쿠니 신사로 개명된 것도 그 때이다. 즉 메이지 정부는 내무성이 관할해 오던 다른 신사와 달리 군부가 직접 관리해 오던 초혼사를 1879년 6월4일 야스쿠니로 바꾼 것이다. 국가 신도 체계를 확립하고 일왕가의 신을 모시는 신궁에 다음 가는 이른바 '별격 관폐사(別格官幣社)'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오에 시노부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가 국민을 통합하는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발전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이다. 러일전쟁 후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사한 일본군 약 8만8천명의 위패가 안치되었는데, 이 숫자는 청일전쟁 전사자의 6.6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수많은 유족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학생들에게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에서 죽더라도 야스쿠니로 돌아온다는 신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으면 반딧불이가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고 굳게 믿고 육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런 '야스쿠니 신화'는 패전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미군 점령군사령부는 일본을 점령하면서 초국가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태워버릴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의 한 목사가 진정하자 맥아더 원수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우파 의원들,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시도


미군의 점령 계획에서도 신사 처리 문제는 매우 중요한 항목이었다. 미군은 일본 전국의 신사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대부분의 신사를 일단 마을 축제를 관리하는 종교적 신사라고 규정했다. 그 중 이세 신궁과 같이 고대 종교 신사이지만 국가주의 사상이 가미된 신사와 야스쿠니 신사·메이지 신궁·노기 신사·도고 신사와 같은 신사는 종교 시설이라기보다는 군국주의 영웅에 대한 숭배와 전투적 국민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국가주의 신사라고 규정했다.


특히 미군 점령군사령부는 일본군이 직접 관할했던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국가주의 전당이라고 단정했다. 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2월 일본 정부에 국가 신도를 폐지하고 신사에 대한 자금 지원 등을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도에 등록된 하나의 종교법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더 이상 점령군사령부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자 야스쿠니 신사를 부활하자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유족의 모임인 일본유족회를 중심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자민당 우파 의원들을 움직여 1969∼1974년 다섯 차례에 걸쳐 이같은 내용을 담은 야스쿠니 신사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고 규정한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야당의 거센 반발로 모두 폐기되었다.




일본유족회와 자민당 우파는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하는 운동도 벌였다. 일본 정부는 점령 상태가 해제되자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들을 '평화조약 제11조 관계 사망자' 또는 '법무사 관계자'로 표현했다. 그들을 전쟁 범죄자라고 부르기를 피한 것이다. 국회도 1953년 전범 사형자를 '공무로 사망한 자'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합사 추진파는 A급 전범들을 일반 전몰자와 똑같이 처우해 달라고 야스쿠니 신사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이들의 집요한 압력에 굴복한 야스쿠니 신사측은 1978년 가을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7명과 감옥에서 병사한 2명 그리고 수감 중 사망한 5명 등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하는 데 필요한 수속을 비밀리에 밟았다.


야스쿠니 신사 법안 추진파는 국영화 법안 통과가 무산되자 종전(패전) 기념일에 해당하는 8월15일에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자는 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역대 총리, 45회 참배…사토, 11회 '최다'


사실 1985년에 공식 참배를 강행한 나카소네 총리 이전에도 일본의 역대 총리는 8월15일은 아니지만 봄·가을에 열리는 대제(大祭) 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다. 예컨대 총리 재임 중 요시다는 5회, 기시는 2회, 이케다는 4회, 사토는 11회, 다나카는 5회, 미키는 3회, 후쿠다는 4회, 오히라는 3회, 스즈키는 8회 참배했다.


오히라 총리는 기독교 신자이면서 야스쿠니 신사 대제에 참석해 구설에 올랐고, 미키는 비록 개인 자격이지만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8월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물의를 빚었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추진파는 전후 40년, 쇼와 60년에 해당하는 1985년 8월15일에 현직 총리의 공식 참배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들은 1978년 자민당 내에 '영령에 보답하는 의원협의회'를 설치한 데 이어 스즈키 내각이 발족한 1980년에는 '유가족 의원 협의회'를 결성하고, 그 이듬해에는 중의원 의원 2백59명으로 구성된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을 발족했다.


마침 1982년에 '전후 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극우 정치가 나카소네가 총리로 취임해 여건이 무르익었다. 나카소네는 1985년 8월15일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뒤 그 길로 야스쿠니 신사에 들러 참배하고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라고 서명했다. 밖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에게 나카소네는 "총리 자격의 공식 참배였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군국주의·국가 신도 부활은 절대 없으며 그런 취지를 이해해 주도록 외국에 설명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총리의 첫 공식 참배 행위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반발이 거세지자 나카소네 내각은 그 이듬해 8월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나카소네 이후 총리가 12명 바뀌었지만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유족회 회장을 지냈고, 공식 참배를 적극 추진해온 하시모토도 총리가 된 후 한국과 중국을 배려해 공식 참배를 자제했을 정도이다.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다시 16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1982년에 〈신편 일본사〉를 둘러싼 역사 교과서 파동이 일어난 후 1985년 나카소네가 공식 참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 문제로 외교 마찰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공식 참배가 16년 만에 강행될 예정이다. 단순히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총리의 공식 참배가 관례화하면, 그 후에는 일왕이 공식 참배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헌법 개정 움직임도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정점으로 한 군국 시대로 회귀할지도 모른다. 즉 공식 참배가 천황제·헌법 개정·군사 대국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이다.


야당들은 현재 'A급 전범 분사안' '별도 국립 묘지 조성안' '무명 전몰자 묘인 치도리가후치 묘원 활용안' 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실현될 일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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