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우탄 등에 업힌 소녀
  • 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2001.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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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
군부와의 관계·경제 회생에 운명 달려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현명한 정치 지도자다."

"오늘의 인도네시아는 그녀를 필요로 한다."

"목숨을 걸고 개혁을 이끌기에는 자질이 너무도 부족한 여인이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을 두고 인도네시아와 세계의 평가는 판이하다. 어떤 평가가 맞는지는 6개월 안에 드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6개월은 아주 긴 시간이다. 이 나라 사회 전반의 부패와 가난에 국민은 신물이 난 지 오래다.




압두라흐만 와히드 전 대통령. 독재 정치 41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통해 당선된 그는 부패 추방과 군·관 개혁을 단행하겠다고 서투르게 행동하다가 21개월이라는 시간만 낭비하고 쫓겨났다. 국민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렵다는 낭패감 속에서도 엄청난 기대를 걸고 메가와티의 등장을 지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풀어야 할 난제들은 산더미이다.
대통령 선거 후 주가가 반짝했다고는 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밑바닥을 헤매고 있다. 은행과 기업은 빚더미에 묻혀 있고 경제 성장은 6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외국인 투자는 끊긴 지 오래고 물가는 치솟고 있다.


중앙 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원하는 아체·이리안자야·말루쿠 지역의 폭동과, 모슬렘과 기독교인의 유혈 충돌로 치안은 무법에 가깝다.


메가와티의 정치 기반 역시 극히 불안하다. 대통령 선출 기구인 국민협의회(MPR)에서 제1당을 유지하면서도 과반수 미달로 메가와티는 소수 당들과 연정을 구성해야 할 판이다. 연정의 제1 파트너는 부통령 함자 하즈의 통일개발당(PPP)이다. 하즈 부통령은 21개월 전 대통령 선거에서 메가와티에게 등을 돌리고 와히드를 밀어 대통령에 당선시킨 공신이었다. 보수적인 모슬렘 하즈가 메가와티를 반대한 이유는 단 한가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와히드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고 메가와티와 막후 협상을 벌여 다섯 후보를 제치고 3차 투표 끝에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와의 연정으로 메가와티는 남성 위주인 모슬렘 세력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게 되었고, 하즈는 제3당이면서도 권력을 나누어 갖는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회정치적 역할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슬람 세력의 총수와, 국사를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 아닌 메가와티의 정략적 제휴가 어느 때까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노련한 정치 모사로 알려진 하즈는 실권 없는 부통령에 만족하지 않고 권력 분담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메가와티에게 제동을 거는 또 다른 연정 파트너는 제1 야당 골카이다. 수하르토 장군의 32년 독재 정권에서 하수인 역할을 해온 골카 당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이다. 부통령 선거에서 패한 골카 당수 탄중은 벌써부터 제1 야당에 걸맞는 주요 각료 직을 주지 않을 경우 연정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밖에 와히드의 국민계몽당(PKB)과, 2천8백만 모슬렘 조직인 모하마디아의 총수 아민라이스 교수가 이끄는 국민수권당(PAN)도 권력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각종 이권과 직결된 장관 직을 따내기 위해 9개 주요 정당들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평소 걸음이 느린 메가와티는 대통령 취임 10일이 지나도록 내각을 구성하지 않고 있다.


대중 인기 높으나 카리스마·용기 부족




정치권의 최대 관심은 메가와티와 군부의 미묘한 역학 관계에 쏠려 있다. 지난 3년간 이 나라를 휩쓴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군부는 한 번도 메가와티 지지를 표명한 적이 없다. 와히드 전 대통령의 비상 계엄 선포와 의회 해산 위협을 '우스갯소리'로 만든 군부는 결과적으로 메가와티에게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을 터준 셈이었다. 군부는 왜 그녀에게 암묵적 지지를 보낸 것일까? 제1당 당수인 메가와티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보수 민족주의 성향인 메가와티는 수하르토 장기 독재에 반대해 오면서도 그 체제를 지탱해 준 군부에 단 한 차례도 직접 비판을 가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군부에 이렇다할 인맥이나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최대 막후 세력을 자처해온 군부는 군을 개혁하겠다고 어설프게 칼을 빼들었던 와히드나, 막강한 모슬렘 세력을 등에 업은 이슬람 지도자보다 메가와티가 다루기에 수월한 상대라고 보았을 것이다. 대중의 인기는 높으나 카리스마와 결단력과 용기가 부족한 메가와티는 거대한 오랑우탄의 등에 업힌 소녀라고나 할까.


첩첩이 쌓인 난제를 떠맡은 메가와티는 국민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할 수 있을까? "2억1천만 인구와 수많은 섬과 종족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모슬렘 국가를 여성의 몸으로 이끌어야 하는 메가와티는 세계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나라를 떠맡게 되었다"는 락사마나 수카르티 박사(대통령 경제고문)의 말은 메가와티의 앞날이 불안함을 적절히 표현했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전면적 개혁은 고사하고 개혁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가와티는 역부족이다. 그녀는 지금껏 조국의 앞날에 관해 뚜렷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서 군부 개혁과 경제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녀는 그럴 만한 지적 능력도 용기도 실력도 없다." 인도네시아 국립 대학 정치학 교수 살림사히드 씨의 혹평이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차분한 부잣집 주부




메가와티의 정치 역정과 출생 배경은 그녀가 타고난 카리스마적 정치인도 아니며, 신념과 용기를 갖고 개혁을 추진할 성격의 정치 지도자도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2년 전 인터뷰를 위해 기자가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정원에서 꽃을 가꾸고 있었다. "취미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니 정원 가꾸기·영화 감상·독서·시내 드라이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용하고 느린 말투에 말수가 적은 그녀에게서 정치 투사의 풍모나 박력은 느끼지 못했고 차분한 부잣집 주부라는 인상만 받았을 뿐이다. 질문을 많이 던졌으나 딱 부러지게 답을 준 경우는 드물다. 인터뷰 도중에도 하인들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시키거나 다과를 주문해 긴장을 풀기도 했다. 자카르타 남쪽 30km, 케바쿠산 지역에 있는 그녀의 저택은 대지 4천여평 건평 2백평 정도의 2층 양옥이다. 이 넓은 저택에서 그는 백만장자 사업가인 남편 타우픽 키마스와 두 아들 그리고 막내딸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저택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는 서민 동네에 있으나 생활은 '부유한 토호'답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장녀인 그녀는 대학을 중퇴하고 세 번째 남편과 결혼한 후에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 수하르토 독재 치하에서 인도네시아판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10년을 보낸 후 주위의 권고로 정치에 적극 뛰어든 것은 불과 7년 전이다. 짧은 정치 역정에서 그녀는 한 번도 투옥되지 않았고, 거리 투쟁에 앞장선 적도 없다. 1998년 반 수하르토 군중 시위로 학생 수십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방화로 50여명이 숯더미로 변했을 때도 민주투쟁당(PDI-P) 당수 메가와티는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침착한 철의 여인'이라는 일부 언론의 표현에 대해 한 언론인은 "그같은 표현은 오히려 비꼬는 데 가까운 말이다. 메가와티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정치 경제에 철학과 비전이 없어 아예 말을 삼가는 편이다"라고 단언한다.


메가와티가 자주 인용하는 국가 지도 이념은 '판차실라'다. 신앙(종교)·인권·단결·사회 정의·민주주의라는 5대 원칙을 골자로 하는 판차실라는 1953년 그의 아버지 수카르노가 주창한 건국 이념이었다. 메가와티는 대통령 취임 사흘 만에 아버지의 무덤을 자카르타 근교로 이장하겠다고 발표했다(묘지는 자카르타 동쪽으로 500km 떨어진 물리타트에 있다). 48년 전의 판차실라를 오늘의 인도네시아에 옮겨와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


야당 당수 시절 메가와티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와 정부의 개혁 없이 경제 개혁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곧 대통령이다. 민주화와 정치 개혁을 이루지 못하는 대통령은 국민의 신임을 얻을 수 없고 국민 신임 없는 경제 개혁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과연 메가와티는 그때 그 소신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 것일까? "정치 개혁은 당연히 군부 개혁을 의미할진대, 그가 군부와 맞서리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라고 아민 라이스 교수는 지적한다.


메가와티는 1950∼1960년대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대통령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34년 전 아버지를 축출했던 수하르토 군부를 축출한 신군부의 '보호'를 받으며 메가와티가 과연 얼마 동안 이 고색 창연한 네덜란드풍의 대통령궁에 머무를 수 있을까? 그 답을 알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내심 많은 인도네시아 국민도 이제 기다림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군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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