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외교 '북방 대진군'
  • 이창주(코네티컷 대학 교수·국제정치) (sisa@sisapress.com)
  • 승인 2001.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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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동맹체제 재가동…실속·상징성·역사성 함께 얻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순방 외교는 방문 기간이나 형식에서 세계 정상 외교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난 7월26일 북·러 국경 도시 하산을 통과한 특별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를 따라 만 8일 여행한 끝에 8월3일 모스크바 야로슬라브 역에 도착했다. 숙소인 크렘린 특별영빈관에 여장을 푼 김위원장은 크렘린 광장 앞의 무명용사묘와 레닌묘 헌화를 시작으로 정상회담 일정에 들어갔다. 8월4일 김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역사적인 북·러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위원장의 방러 외교는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전략적 관망 및 대립 상태에 처해 있고, 아직도 국제 사회가 북한의 정치·경제 사정에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미국은 물론 일본까지 가세해 그 배경과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진상에 접근하지 못한 채 추측만을 내놓았다.


김위원장 방러에 앞서 북한은 그동안 은밀하고 치밀하게 러시아와 핫라인을 가설하고 특별팀을 가동해 왔다. 즉 지난 수 개월 동안 김정일 위원장의 공식 방러 일정 및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을 준비해온 것이다. 특히 러시아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인 데니소프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가 이끄는 실무 외교팀은 김위원장 방러의 역사성·상징성·특별성을 연출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소 수교 당시 소련 외무차관으로서 실무 사령탑을 맡았던 로가초프 베이징 주재 러시아대사는 충분한 사전 협의와 조율을 거친 뒤 성사된 김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예상대로 성공을 거두면 동아시아에 새로운 역학 구도가 형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과 러시아가 이번 김정일 위원장 방러를 계기로 공유하게 된 이해 관계의 특징은 다음 다섯 가지 큰 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북·러 양국은 그동안의 개별적인 대미 협상을 앞으로는 동맹 체제를 근간으로 한 협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강경한 공화당 행정부와 일본의 고이즈미 우경 정권의 대북 적대 정책 동맹에 대응해 북방 동맹 체제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한국과 미국이 백남순 북한 외무상의 하노이 아시아지역안보포럼 참석을 계기로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에 돌파구를 열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백외무상을 불참시키고 김위원장 스스로 러시아 장기 방문을 결정한 것 역시 이같은 기조를 뒷받침한다." 북한 주재 참사관을 지낸 러시아 외무성 국제국 미네야프 부국장의 설명이다. 러시아의 경우 북한과는 위상이나 이해 관계가 다르지만, 현재의 대외정책 기조에서 북한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 북한 경제 개혁에 적극 동참 약속

 


둘째, 북한과 러시아가 명실상부하게 동맹 관계를 재구축하기로 상호 합의했다는 점이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의 3대 핵심 의제는 군사 및 경제 협력과 국제 관계에서의 상호 협력이다. 지난 4월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과 그 뒤를 이은 부부장급 실무협상팀이 러시아를 방문해 전투기 등 첨단 무기 구입 및 북한 내 러시아제 무기 운용 지원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한 모스크바의 국방 관계자는 북한의 러시아 채무 문제와는 무관하게 상호 군사협력 의정서를 기초로 해 일정 규모의 러시아제 첨단 무기를 포함한 대북 군사 협력 및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같은 군사 협력이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구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도입하기를 희망하는 수호이 27·미그 29·S300 지대공 미사일·T90 전차 같은 최신예 러시아 무기 공여를 긍정 검토하기로 사전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의 재래식 무기 감축과 북한 군사력 약화를 대북 관계의 기조로 삼고 있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런 조처를 취한 것은 그만큼 북한이 러시아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셋째, 러시아가 앞으로 대북 경협을 주도하는 국가의 반열에 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러시아 경제 역시 불안정하기 때문에 상환 여부가 불투명한 북한 지원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러 관계의 역사적 특수성과 북한의 산업 구조를 고려할 때 북한을 방치하기보다는 일정 정도 지원하고 협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고 실리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북한의 경제 개혁 프로그램에 적극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 경협 프로젝트의 골격을 보면, 그 첫 단계가 옛 소련이 공여한 러시아제 산업 설비를 가동할 수 있도록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단순 물자 제공보다는 훨씬 효과적인 방식이다.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어 중국보다 비교 우위에 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이해 관계에서 서로 일치하는 빅딜 프로젝트가 바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한반도 종단 철도(TKR)를 연결하는 문제인데, 이미 서로 깊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양측이 이 프로젝트에 쉽게 합의한 것은, 이 일이 이미 양국간 관심사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 건국 초기의 북·소 관계 구도가 재현될 수도 있다.


북한이 사전 답사팀까지 보내 총연장 9288km인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김위원장의 방러 코스로 선택한 것은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고 러시아 당국자는 풀이한다. 러시아가 의전과 보안에서 불편과 어려움이 많은데도 이런 방식의 방문을 수용해 철저한 경호와 국빈 대접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한 대사를 지낸 아파나시예프 외무성 아주국장은 말했다.

 


북한 체제 견고성 대내외에 과시

 


넷째, 북한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러시아가 적극 협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미사일 방어(MD)의 명분으로 삼을 정도로 북한이 불량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스크바가 보증한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의 일방적인 매도에 시달려 왔다. 중국과의 동맹 관계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체제 연대의 일환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인 세계 외교를 추진하며 국제 문제에 개입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공동 대응할 우방국으로 천명할 경우 그것은 김정일 외교의 커다란 성과로 보기에 충분하다. 특히 러시아가 북한 미사일의 성격을 평화적인 자위 수단이라고 규정해 줌으로써 한반도 긴장 국면 조성이 미국의 패권 전략에 기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러시아는 또한 북한의 유럽연합(EU) 외교 및 국제 기구 가입을 평가하고, 북한이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임을 밝혀 북한의 국제적 위치를 높여 주었다.


다섯째, 북한 체제의 견고성과 안정성을 대내외에 표방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질서가 확고하게 뿌리 내린 서방 국가의 경우도 국가 최고 지도자가 1주일 이상 자리를 비우면 국정에 공백이 생길까 봐 우려한다. 그러나 북한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서방 시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을 무려 20일 간이나 비우는 장기 외유를 결행했다. 러시아의 한 외교관은 이를, 김정일 위원장이 국내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하고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김위원장의 장기 외유에 따른 북한 내부 상황의 불안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나 김위원장 체제가 대단히 확고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보기관도 모든 통로를 총동원해 북한 상황을 점검하고 심지어 특별 공작 가능성까지 검토했으나 결코 허물 수 없는 체제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 점이야말로 김위원장이 노린 또 다른 전략적 효과이다.


양국 정상의 모스크바 공동선언은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속·상징성·역사성 모두를 얻었다. 세부 계획에 대해서도 이미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져 실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여세를 몰아 북한은 9월 하순으로 예정된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켜 일련의 외교 퍼레이드를 벌일 계획이다. 이것은 앞으로 북한의 대남·대미·대일 외교에서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에 새로운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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