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MD 직거래' 튼다
  • 최성혜(국제문제 전문가) ()
  • 승인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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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계기로 안보 협력 급물살…북·러 '반미 전선' 흔들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둘러싼 러시아의 대외 전략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8월 들어 모스크바에서는 굵직한 회담이 두 번 열렸다. 8월13일의 미·러 국방장관 회담은 미국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와 러시아가 추진하는 핵 감축을 연계해 협상하는 자리였다. 비록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미사일방어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에 앞서 8월4일 크렘린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예상과 달리 미사일방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이 문제를 둘러싼 북·러의 반미 공조 체제에 변화가 있음을 시사했다.




예정대로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답방은 늦어도 지난 4월까지는 실현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사실상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가 끝날 때까지 미루었다. 반면 4월 미·중 정찰기 충돌 사건 이후 미·러 관계는 빠른 속도로 진전되어 갔다. 부시 정부 출범 초기의 냉기류가 걷히고 양국은 조기 정상회담 개최 등을 통해 국제 안보 현안을 놓고 '직거래'에 들어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 땅에 첫발을 들여놓던 7월26일 오전 라이스 미국 국가 안보보좌관은 이틀 간의 협상을 끝내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라이스 보좌관은 기자회견에서 북한 미사일과 관련해"러시아가 북한을 달래줄 것으로 기대한다"라는 짧고 의미 깊은 한마디를 남겼다. 열흘 간의 기차 여행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정일 위원장을 맞은 사람은 클레바노프 부총리였다. 백남순 북한 외무상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러시아 외무장관은 휴가지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다. 본래 8월 4∼5일로 잡혀 있던 정상회담 일정을 도착 당일인 4일에만 하는 것으로 단축했고 기자회견도 생략했다.


두 정상이 발표한 '모스크바 선언'은 지난해 '평양 공동선언'의 축소판이었다. 그나마 미사일방어 조항도 빠져 있었다. 대신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 준수를 언급하는 수준으로 미국의 미사일방어 구상에 대한 비난 수위를 크게 낮추었다. 크렘린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조항을 넣자는 북한의 제안에도 신중했다. 북한이 이 문제를 '초미의 관심사'라고 강조한 데 반해 러시아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정도에 그쳤다. 지난 1년간 양국을 결속시켜온 반미 연대가 퇴조한 분위기였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일본 〈마이니치 신분〉 은 '러시아와 중국의 힘을 바탕으로 대미 전선을 구축하려는 북한의 구상에 러시아가 차가운 시선을 보낸 측면이 있다'고 논평했다. 러시아가 주도권을 쥐었던 반미사일방어 체제를 놓고 양국의 입장이 뒤바뀐 셈이다.




'푸틴은 미국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슬로베니아 미·러 정상회담 이후 크렘린의 대미 전략 변화와 관련해 러시아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7월4일자)가 지적한 말이다. 미·러가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를 재정립하리라는 것은 부시 정부 출범 초기부터 예상되었다.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크렘린의 정치 고수들은 공화당 행정부의 출범을 내심 반긴 것이 사실이다. 경제를 중시하는 클린턴과 달리 국방력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부시측이 보기에 러시아는 중요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렘린은 러시아가 더 이상 미국의 국익에서 주변부가 아니라 외교·안보 정책의 대상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푸틴 대통령은 바로 이와 같은 '공통의 언어'를 바탕으로 부시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낙관해 온 인물이다.


대량 살상무기 확산을 둘러싸고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대규모 스파이 맞추방 등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지난 5월 러시아는 부시 행정부로부터 뜻하지 않은 제의를 받았다.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을 위해 미국이 S300 지대공 미사일을 포함한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하고 노후한 러시아의 조기경보 체제 개선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군사 원조 제안은 부시 행정부 초기의 대러시아 강경 노선이 수정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미사일방어 문제로 대내외의 공세에 시달리던 부시는 러시아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러시아에 유화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5월17일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과 '건설적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는 푸틴 대통령의 친서를 백악관에 전달했다. 이로써 양국 정상회담이 6월16일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 정상 '텍사스 선언' 나올 수도


류블랴나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는 양국이 냉전적 전략 구조의 기본 틀을 청산하고 21세기 전략 구조에 맞추어 새로운 안보체제의 기본 틀을 모색해 가기로 합의한 데 있다. 이어 이탈리아 제노바 G8 정상회의 폐막 직후 양국 정상은 별도 회담을 갖고 미사일방어 계획과 핵무기 감축 협상을 연계하기로 매듭지음으로써 미사일방어 추진에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미국은 7월24일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모스크바로 급파해 러시아측과 실무 협상을 개시했다. 12일에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취임 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이바노프 국방장관과 ABM제한협정 개정 및 실질적인 핵 감축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양국은 단계적으로 미·러 전략 안보 협상을 전개해 냉전 시대를 청산할 새로운 전략을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오는 9월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전략 안보 체제에 대한 외교 협상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여기서 양국간 전략 안보 협상의 기본 틀이 마련되면 양국 대통령이 올해 안에 협상을 마무리지을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두 정상은 올해에만도 10월에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과 11월에 있을 푸틴 대통령의 방미 때 두 차례 더 만날 예정이다. 방미 기간에 푸틴은 부시의 고향인 텍사스에 들를 계획인데, 일각에서는 새로운 전략 안보 체제에 관한 '텍사스 선언'이 나올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부시 시대의 '캠프데이비드 선언'이 될 '텍사스 선언'의 성사 여부는 미국이 어떤 반대 급부를 러시아에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러시아는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동시에 나토의 동진 정책을 중단하고 옛 소련 지역과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미·러가 협력 구도로 전환하면 미사일방어를 기본 축으로 한 북·러·중 삼각 체제의 결속력은 다소 약해질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이 중국 쪽으로 더욱 기울면 미국은 러시아를 앞세워 이를 '관리'하려 들지 모른다. 한반도를 에워싼 세력 구도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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