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무시증' 걸린 부시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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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 관심 없고 관련 조직 '난맥'…
보수 일변도, 온건파 설 땅 없어


미국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북·미 대화가 표류하고 있다.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 씨는 최근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북한 정책에 관한 부시 행정부의 태도를 보면 대화가 아쉬운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태도는 북한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국무부에서 북·미 기본합의문실 책임자를 지냈고, 민간 두뇌집단으로 이름난 브루킹스 연구소의 연구원인 조엘 위트 씨의 지적은 더욱 날카롭다. 그는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은근한 무시 정책(benign neglect)'을 취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더욱 심각한 것은 부시 행정부 전반에 북한을 무시하는 증세가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라고 경고했다.


위트 씨가 지적한 대로 과연 부시 행정부는 '북한 무시증'에 걸려 있는 것일까. 협상 의제는 접어 두고라도 대북 접촉 수준만을 언뜻 살펴보면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 우선 접촉 횟수부터 보자. 지난 1월 중순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북한과의 공식 접촉은 6월13일 상견례 성격의 뉴욕 회담이 유일하다. 국무부는 7월 하순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안보 포럼에서 북한측과 접촉할 중요한 기회마저 놓쳤다. 만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 백남순 외무상을 만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면 두 사람이 회동할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았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북 접촉 수준은 어떤가. 부시 행정부는 대북 협상과 관련해 우선 1차 실무 접촉을 차관보급 이하 중간 관리에게 일임했다. 협상에 진전이 보이면 고위급 관리를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뉴욕 접촉 때 국무부의 잭 프리처드 한반도 특사가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프리처드는 국무부에 특채되기 전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국장을 지낸 경력이 있지만 전임 찰스 카트먼처럼 대사급은 아니다. 이런 위상은 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국무부를 제외한 국방부·국가안보회의·중앙정보국은 북한과 대화하기보다는 핵사찰과 미사일 검증 등 협상 조건을 관철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주명분으로 미사일 방어 체제를 강행하려는 국방부는 북·미 간에 최대 현안이라 할 미사일 협상 자체에 관심이 없다.


북한 정책 두고 국무부·국방부 티격태격




이외에 대북 정책과 관련한 행정부 조직의 난맥상도 중증이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조셉 바이든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도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3월 북·미 대화에 찬물을 끼얹은 부시의 발언을 두고 "당시 제대로 외교 진용을 갖추지 못한 데다 조직상의 혼란이 컸다"라고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조직상의 혼란은 대개 해당 부처간 정책 갈등에서 비롯한다. 특히 북한 정책을 둘러싼 국무부와 국방부의 알력은 심심치 않게 표출된다.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3월 이미 〈뉴욕 타임스〉는 북한 정책과 관련해 파월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의견 충돌을 빚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논설위원인 콜린 레비 여사는 "주요 외교 현안을 놓고 파월 국무장관이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물론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도 불화하고 있다. 의견차가 클 경우 외부 세계에 부시 외교팀에 분란이 있다고 비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북한 정책과 관련한 관료 조직은 또 어떤가. 외교 정책 결정 과정이 비교적 단순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관료 조직이 복잡하고 의견 수렴 절차가 번거롭기로 악명이 높다. 북한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대북 협상의 공식 창구는 국무부이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과정에는 국무부뿐 아니라 국방부·중앙정보국·합참본부·에너지부·국가안보회의, 심지어 부통령실까지 개입한다. 게다가 각 부처에는 북한 미사일이나 핵, 재래식 병력 문제와 직·간접으로 연계된 부서들이 포진해 있어 부처간 정책 조율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국무부의 경우 군축국·정치군사국·비확산국·정보조사국이 북한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국방부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산하에 있는 전략위협감소국·기술안보국뿐 아니라 국방정보국의 비확산국과 아태지역 분석국도 북한 문제에 개입한다. 합참도 군별로 광범위한 정보 수집 체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첩보 위성을 가동해 북한의 미사일과 핵시설 등을 촬영해온 중앙정보국(CIA)은 정보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 정책 수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프랭크 밀러·봅 조셉·수전 쿡 등 핵 및 비확산 전문가들이 포진한 국가안보회의도 북한에 근본적 회의를 품고 있다.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처럼 첨단 무기 실험실을 관할하는 에너지부도 북한 문제에 관여한다. 말하자면 부시 행정부 전반에 걸쳐 수많은 관리가 매일매일 북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북한 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단 한 사람, 부시 대통령에게 있다. 그가 의장으로 있는 국가안보회의에는 부통령·국무장관·국방장관이 정회원으로 참석하고, 국가안보보좌관·중앙정보국장·합참의장이 배석한다. 이 가운데 부시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대북 강경파인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이다. 외교 문외한으로 알려진 부시는 그녀에 대한 의존도가 특히 높다.


국방장관을 지낸 딕 체니도 과거 어느 부통령보다 외교안보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는 과거 국방부 고위 관리 출신인 루이스 리비를 부통령 비서실장 겸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해 별도 외교팀을 가동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얼마 전 체니를 일컬어 '사실상의 백악관 비서실장·안보보좌관·국방장관을 모두 합친 초강력 권한을 가진 인물'이라고 꼬집었다.


"국무부 내에서 긴장 관계 형성될 수도"




이처럼 부시 행정부의 북한 정책이 보수 일변도로 흐르면서 실용파(또는 온건파) 관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국방부·중앙정보국·국가안보회의 수뇌진은 말할 것도 없고 실무자 대다수가 이념적으로 보수파다. 그나마 실용파가 몰려 있는 곳이 국무부다. 물론 파월 장관이나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 제임스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 모두가 실용파이기는 하지만 이들도 다른 부처 사람들에 비해 정도가 덜할 뿐 보수적 북한관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실용파가 주류를 이루는 국무부에도 예외는 있다. 서열 3위인 존 볼튼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이 그 주인공이다. 볼튼 차관은 최근까지도 보수적 두뇌 집단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부소장으로 있었던 골수 보수파다. 군축국·비확산국·정치군사국·검증 및 준수국 등 국무부 내 북한 관련 핵심 부서가 그의 관할이기 때문에 그의 행보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비확산 전문가인 존 월포스톨 연구원은 "국무부의 대북 협상 지휘권을 가진 볼튼 차관과 그의 상사인 아미티지 부장관, 파월 장관 사이에 앞으로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가 전반적으로 북한 무시증에 걸려 있어 실용파의 입지는 매우 좁다. 브루킹스 연구소 위트 연구원은 "현재 부시 행정부는 부처를 가릴 것 없이 북한 정책에 관한 한 이념적 보수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특히 지금처럼 북한 정책의 핵심이 핵·미사일·재래식 병력 위협인 상황에서는 국무부 내에서조차 지역 전문가보다는 안보 전문가의 영향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국무부의 대표적 실용파인 켈리 차관보만 해도 그렇다. 그는 부시 행정부 내의 여러 안보 관련 차관보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자연히 그의 대북 영향력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평상시 북한 문제는 고위 관리들의 정책 우선 순위에서 한참 밀린다. 북한이 또다시 탄도 미사일을 실험한다든가 한·미 동맹 관계가 위험 수준에 달한다든가 하는 '비상 상황'이 벌어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안보 부처 고위 관리들은 평상시 북한보다는 중국이나 일본 문제에 더 비중을 두기 마련이다.


북·미 대화, 제자리걸음 계속할 듯




이런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주도권을 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덩달아 북·미 대화도 현재의 제자리걸음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묘책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한 가지 타개책으로 부시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전권을 갖는 특사를 임명하기를 권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 특사인 프러처드는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 한반도 문제 논설위원을 지내고 현재 사회과학원(SSRC) 동북아연구실장인 레온 시걸 박사는 "부시 대통령이 과거 장관급인 윌리엄 페리 북한정책조정관 정도의 고위급 인사를 임명해 대북 현안을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무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사를 임명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을까. 브루킹스 연구소 위트 연구원은 북한의 태도 변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는 미국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북한이 지금이라도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일 경우 부시 행정부내 실용파의 입지가 크게 강화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전제 조건'을 먼저 철회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어서 북한의 태도 변화도 당분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가까운 장래에 부시 행정부의 특사 임명이나 북한측의 태도 변화 어느 쪽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북·미 대화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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