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공포 부추기는 미국 지도자들의 '경거망동'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e-sisa.co.kr)
  • 승인 2001.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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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뻥뻥' 뒷북치기 '꽝꽝' 백색공포 '활활'
가뜩이나 탄저균 테러 공포로 심리가 위축된 미국인들이 정부나 의회 지도자들이 갈팡질팡하자 더 불안해 하고 있다. 우선 연방 정부에서 관련 부처 간에 얼마나 손발이 안 맞는지 들여다보자. 탄저균 테러에 관한 주무 부서는 연방수사국(FBI)이지만 질병통제예방센터(CDCP)·국립보건원(NIH)·연방위기관리청(FEMA), 심지어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까지 간여한다. 현재 탄저균과 같은 공중 보건 및 생물 화학 테러에 관여하는 연방 기관은 무려 20곳에 달한다. 그러나 탄저균 희생자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이들 기관이 업무 조정은커녕 탄저균 출처조차 규명하지 못했다. 보다 못해 민주당 부통령 후보를 지낸 조셉 리버먼 상원의원은 "도대체 어느 기관이 이번 사태를 관장하는 것이냐"라며 부시 행정부를 신랄히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9월11일 테러 참사가 터진 뒤 톰 리지 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백악관 직속 국내보안국(OHS)책임자로 임명해 부처 내 테러 업무 조정역을 맡겼다. 그러나 출범한 지 고작 열흘 정도인 국내보안국은 필요한 인원을 제대로 충원하지 못해 부처간 업무 조정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더군다나 리지 국장은 NBC 텔레비전에 출연해 탄저균 사태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비행기 납치 테러가 터질 경우 해당 비행기를 격추할지 여부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 주업무다"라고 태연스레 말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지난 10월15일 탄저균에 감염된 우편물이 톰 대슐 상원 원내총무실에서 발견된 직후 연방 정부 대응 역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토미 톰슨 보건장관은 문제의 우편물이 탄저균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직후 "별로 걱정할 게 못 된다"라고 반응했다가 이틀 뒤에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시기에 직면해 있다"라는 아리송한 발언을 했다. 그는 10월4일 플로리다 주에서 최초로 탄저균 희생자가 발생하자 "문제의 희생자가 지난주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여행하다가 계곡의 물을 마신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그의 사인이 탄저균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의회를 마비시킨 10월15일의 탄저균 우편물 사태 이후 부시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차 중국 상하이로 출발하던 17일까지 사흘간 백악관 차원의 공식 브리핑 한 번 없었다.




또 하나 문제점은, 탄저균에 관해 연방 정부가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국민이 매일 탄저균 테러 공포로 심리적 공황을 겪고 있는데도 연방 정부는 정확한 진상 공개를 꺼림으로써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테면 10월4일 플로리다에서 최초로 탄저균 피해자가 발생한 직후 톰슨 보건장관은 보건부 소속 과학자들에게 언론과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선정주의적 타블로이드 신문은 물론 유수한 언론까지도 탄저균 테러에 관해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실어 국민의 공포와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정보 공개하지 않아 공포·불안 더욱 커져


일부 의회 지도자들은 무책임한 언행을 일삼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 왕년에 축구 선수였던 그는 10월17일 어처구니 없는 실언을 해 빈축을 샀다. 즉 수사관들이 상원 건물의 우편물 보관처는 물론 일부 건물에 있는 환기구에서 탄저균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다. 이에 존 케리 상원의원이 즉각 부인하자, 해스터트 의장은 탄저균이 상원 건물 환기구에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얘기한 것이라고 궁색하게 변명했다. 그러나 수사당국의 최종 확인 결과 환풍구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탄저균도 발견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해스터트 의장은 보안을 이유로 10월17∼22일 하원 업무를 일시 중단시켰다. 의회 직원 30여 명이 탄저균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이를 빌미로 의회의 문을 닫은 데 대해 의원들조차 비판적이다. 입법기관 수장인 국회의장이 탄저균에 겁먹고 줄행랑 놓는 모습을 보여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국민에게 '정상적으로 일상 생활을 계속해 달라'고 호소해온 정치인들이 막상 이번 같은 위기에 직면해 제 몸부터 사리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민의 실망감은 더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국민에게는 정상 생활로 돌아가라고 해놓고 하원의원 4백35명이 그처럼 빨리 줄행랑 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고 개탄했다.


어디 해스터트 의장뿐인가. 대슐 상원 원내총무실에 전달된 문제의 탄저균 감염 우편물과 관련해 일부 의원들은 가공할 만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를테면 대슐 원내총무는 문제의 탄저균을 '제조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이 만든 매우 강력한 탄저균'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리처드 게파트 하원 민주당 총무는 심지어 '고성능 무기급 탄저균'이라고 정의했다. 또 올림피아 스노 상원의원은 '잘 정제된 가루'라고 말했다. 문제의 탄저균이 과연 얼마나 정교한 것인지 최종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발언들이 언론을 통해 대서 특필되자 국민의 공포감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지 파타키 뉴욕주지사도 신중치 못한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자신의 경호 사무실이 탄저균에 노출되었다는 이유로 주 업무를 일시 정지시킨 그는 "주정부 직원들이 탄저균 양성 여부 실험을 받게 하기보다는 강력한 항생제인 시프로를 제공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성 여부와 관계없이 항생제를 투여했을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의료 전문가들의 견해다. 직원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한 얘기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발언은 뉴요커들에게 항생제를 비축하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뒤늦게나마 리지 국내보안국장과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이 10월18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 보호책을 내놓고, 탄저균 테러와 관련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 현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런 뒷북치기 대응에 미국민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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