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외국인의 지옥'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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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 없이 검문 · 감청 · 압수 수색…
테러 용의자는 군사 법정에서 재판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는 더 이상 외국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 테러와 연루되어 체포당했거나 구금된 사람이 천명이 넘는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의회를 통과한 반 테러 법안들이 겨냥하는 주요 대상은 외국인, 그 중에서도 아랍인이다. 수사당국은 이제 판사의 영장 없이 심증만으로도 외국인을 불심 검문할 수 있을 뿐더러 변호사와 피고인의 비밀 대화 내용까지 감청할 수 있다. 테러 혐의로 체포된 외국인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이 아닌 군사 법정에서 재판한다.


이 모두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고 자처하던 미국에서 9·11 테러 사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법조계와 민권 단체가 반발하자 〈뉴욕 타임스〉는 최근 사설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두 달째를 맞이해 민권 자유가 퇴색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시의 '미국 애국령'은 끔찍한 악법"




현재 인권 침해와 관련해 큰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은 11월 초 부시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한 '미국 애국령'(USAPA)이라는 법이다. 최근 의회에서 초당적 지지를 받으며 통과된 이 법은, 테러 용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수사당국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앞으로 이 법에 따라 수사당국은 테러 용의자를 언제든 압수 수색하는 것은 물론 억류하거나 추방할 수 있다. 또 은행 기록과 인터넷 교신 내용도 감청할 수 있다.


이 법의 주요 대상은 테러 관련 용의자이지만 수사당국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테러와 무관한 외국인 용의자도 그 대상에 포함할 수 있다. 미국민권연맹(ACLU)은 이 법이 '비헌법적이며 끔찍한 선례를 남기는 악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미국 형사변호사협회 어윈 슈워츠 회장은 전자 감청 허용이 제일 먼저 법원에서 도전받게 될 것이라며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은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의 지론이다.


'미국 애국령'과 함께 논란을 빚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애시크로프트 장관이 지난 10월 말 변호사와 피고인 간의 비밀 대화 내용을 감청할 수 있도록 내린 행정 명령이다. 이 명령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판사의 영장 없이도 변호사와 피고인 간의 대화 내용을 최고 1년간 감청할 수 있다. 법무부는 이번 조처가 '일부 피고인이 변호인을 통해 외부 인사에게 테러 행위와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강변한다. 아울러 현재 연방교도소에 갇혀 있는 죄수 16만여 명 가운데 이번 조처에 해당하는 사람은 13명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9월11일 이후 수사당국이 체포했거나 억류한 사람 1천1백여 명 모두가 이번 조처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관측된다. 법무부는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라는 언론과 민권단체의 압력을 무시하고 있다.


FBI, 중동 출신 유학생 5천명 '특별 관리'




현재 모든 미국 거주 피고인은 수정헌법 6조에 따라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형법상 변호사는 자기가 대변하는 피고인과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법무부의 이번 조처는 사실상 수정헌법 6조를 부인하는 꼴이 되기에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법무부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테러와 1995년 오클라호마 시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테러 관련 피고인에 대해 특별 행정 조처를 취한 바 있다. 그들은 독방을 쓰고 방문객과 전화 내용에 일일이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도 변호사와 피고인 간의 대화 내용은 비밀이 보장되었다. 미국변호사협회 로버트 셔혼 회장은 "이번 조처는 수정헌법 6조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연방 상원 패트릭 레이 법사위원장은 애시크로프트 장관에게 강력한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종전 같으면 이런 법안에 강력히 제동을 걸었을 레이 위원장이 행정부의 대 테러 전쟁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법사위 차원의 대응은 삼가고 있다.


'미국 애국령'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연방수사국(FBI)의 중대한 역할 변화다. 연간 35억 달러 예산을 확보한 연방수사국은 종전처럼 범죄 수사에 매달리는 대신 앞으로는 테러와 관련한 국내 정보 수집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원래 연방수사국은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갖고 있었으나 25년 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추문'에 연루되면서 그같은 기능을 상실했다. 의회가 수사당국의 국내 정보 수집 행위를 '또 다른 형태의 정부 권력'이라고 보고 그 기능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정보 수집 기능이 복원되었다는 사실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균형을 이루어 온 '국내 안보'와 '민권 자유'라는 두 기둥이 전자 쪽으로 크게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조계와 민권단체들은 수사당국이 국내 정보 수집 권한을 남용할 경우 미국내 외국인 거주자들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국내 정보 수집과 관련해 법무부는 단순히 테러와 연계되었을지 모른다는 '심증'만 있어도 용의자에 대한 전자 감청과 압수 수색을 언제든지 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최근 연방수사국 요원들은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주로 중동 출신 유학생들을 상대로 심층 면접을 하고 있다. 대상은 18∼33세 남자로서 지난 1월 이후 입국한 사람인데, 면접 대상이 무려 5천명에 이른다. 수사당국은 이미 2백개 이상 대학에서 유학생 인적 사항을 모조리 파악했다. 인권단체들은 이런 행위야 말로 특정국 출신 외국인들을 따로 관리하려는 '인종 기록' 행위라며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11월13일 행정 명령을 통해 앞으로 테러 용의자에 대한 재판을 특별 군사 법정을 통해 진행하도록 한 것도 인권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들은 재판의 신속성과 비밀을 이유로 실시될 군사 법정은 전쟁 때나 있을 수 있는 '비밀 재판'과도 같으며, 국제법에도 어긋난다고 말한다. 또 테러 참사 이후 외국인에 대한 구금이나 체포가 크게 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법무부가 최근까지 집계한 구금자 수는 1천1백명을 넘어섰다.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중동 출신이다. 또한 애시크로프트 장관은 테러 용의자들의 미국 입국을 아예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최근 46개 이슬람 관련 단체 회원을 입국 금지 명단에 추가했다. 이에 따라 입국 금지 단체는 74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조처가 테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수많은 외국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새로 강화된 비자 발급 규칙에 따라 특정국 외국인은 과거의 여행 기록을 포함한 자세한 사항을 밝혀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당국의 신원 조사가 끝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특정국은 중동과 서남아시아 일부 회교국을 포함해 모두 26개국이다. 조지타운 대학 헌법학자인 데이비드 콜 교수는 "부시 행정부가 단속의 초점을 실제 테러리스트에서 미국이 기피하는 단체와 관련된 외국인들에게로 바꿨다"라며 행정부의 처사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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