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마 비디오, 제목은 ‘거짓말’?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rena@e-sisa.co.kr)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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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가 오른손 사용하는 등 의혹투성이…번역도 제멋대로
오사마 빈 라덴이 9·11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이런 의문은, ‘오사마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테러를 꾸미겠는가’라는 상식적인 반론에 밀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오사마는 9월 테러 음모를 꾸미기에 충분한 경력과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 증거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미국과 영국은 이런 논리를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했다.




마치 지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 뉴욕의 테러 현장 앞에서 세계 여론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테러에 보복하는 전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의 일부 언론이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미국 외교의 실상을 밝히고, 미국 정부가 오사마 조직에 대한 수사를 막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오사마의 정체에 대한 의혹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시사저널> 제632호 “테러 조직 수사 막는 보이지 않는 손 있다” 참조). 2001년 12월13일, 부시 정부는 이런 상황을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바로 오사마가 9월 테러의 배후임을 입증한다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펜타곤이 11월 말에 입수했다는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11월 중순 오사마와 그의 부관들이 9월 테러를 화젯거리로 삼아 웃고 떠드는 모습이 들어 있다. 화면 밑에 흐르는 영어 번역문에 따르면, 오사마는 여객기 납치범들이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또 누가 비행기 조종을 맡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무역센터 파괴 부분과 희생자 규모를 실제와 다르게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니 오사마는 이 비디오 테이프에서 자신이 9월 테러를 지령했다고 분명히 자백한 게 아닌가? 이래도 오사마가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는가? 부시 정부는 테이프를 공개한 후 이런 질문을 던졌고, 나토와 이스라엘은 물론 아랍권의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도 미국 편에 섰다. 그들은 “오사마의 잔인한 본성이 생생하게 드러났다”(미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오사마의 테러 개입을 입증할 증거는 더 이상 필요 없다”(이집트 내무장관)라고 말했다.


그런데 테이프를 보면 오사마는 오른손잡이다. 1999년 6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오사마를 현상 수배할 때 분명히 왼손잡이라고 발표했다. 비디오에서 오사마는 귀고리를 달고 있는데 지금까지 오사마가 공개한 자기 사진 가운데 시계말고 다른 장신구를 단 모습은 없다. 오사마가 그 사이 왼손 쓰기를 그만두고 패션도 바꾼 것인지 의문이다.

비디오는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잡음이 크다. 화면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어둡다. 아무리 아마추어가 찍었다고 해도 이렇게 조악한 비디오가 또 있을까? 오사마는 유럽의 고급 휴양지로 이름난 지중해 해변에 부동산을 갖고 있고, 보스니아·코소보에서 나토 병사들이 드나드는 유곽을 장악하고 있다고 알려진 거부이다. 그가 비디오 촬영을 원했다면 최신 캠코더를 썼을 것이다.

카불에서 찾아갔다는 방문객은 오사마에 비교하면 음성도 또렷하고 얼굴도 빈번히 화면 정면에 나타났다. 그에 비해 오사마의 목소리는 계속 어눌하고 얼굴은 옆모습만 보인다. ‘아마추어’ 작가는 왜 이리 복잡한 기술을 발휘한 것일까? 영국 신문 <가디언>(12월15일자)은 비디오 전문가의 말을 빌려, 이 정도 테이프는 디지털 화상 합성과 음향 삽입 기술로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특히 잡음은 마지막 조작 단계에 넣는다고 보도했다.


영어 번역문에 따르면, 오사마는 테러범들이 여객기에 탈 때까지도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 연방수사국이 확보했다는 납치범들의 유서는 누가 썼으며, 여객기를 무역센터와 펜타곤에 충돌시키는 정밀 조종은 누가 한 것인지 의문이다. 오사마는 테러 소식을 기다리던 9월11일, ‘우리 시간으로’ 5시30분에 라디오를 틀었다고 했다. 그가 부관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과의 시차까지 생각해서 ‘우리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국제 감각을 보여준 것일까?



이런 의혹이 모두 억측이고 오사마가 9월 테러의 주모자가 분명하다 해도, 또 하나 남는 의문이 있다. 비디오가 만들어진 때는, 오사마가 숨어 있다는 동굴 기지에 미군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목숨이 위급한 오사마는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사마는 왜 한가하게 자신의 극비 정보를 비디오에 남기고 펜타곤의 손에 들어가게끔 방치했을까? 만약 누군가 오사마도 눈치 채지 못하게 비디오를 찍어 밖으로 보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과연 이 테이프가 오사마의 9월 테러 배후설을 입증할 수 있는가? 번역문대로라면 충분한 증거가 될지 모른다.


미국 번역가들이 ‘유리한 내용’ 삽입


그러나 비디오가 공개되고 1주일이 지난 12월20일, 독일 공영 텔레비전(WDR)의 시사 프로그램 <모니터>는 영어 번역문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는 (뉴욕 테러의) 사망자를 사전에 계산했다”라는 말이다. ‘사전에 (in advance)’라는 단어는 테이프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이어 등장하는, 오사마가 “사전 테러 계획을 갖고 있었다”거나 “사망자 규모를 계산했다”라는 구절도 대화 내용에는 없다고 한다. 두 번째, “우리는 지난 화요일(9월11일)부터 이 날 테러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라는 번역문에서 ‘지난(previous)’은 물론 ‘이 날 테러가 일어난다’는 부분도 비디오에서는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세 번째는, 오사마가 테러범들을 화제로 삼으면서 했다는 말이다. “우리는(we) 그들에게 미국에 가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테러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에서 앞부분은 ‘그들은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다’고 번역해야 하며, 뒷부분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음질이 나쁘다고 한다.


부시 정부는 비디오의 영어 번역에 일부 실수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오사마의 테러 배후설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부분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였을까? <모니터>의 의뢰를 받아 공인 번역가 2명과 함께 비디오를 분석한 아랍학 교수(게르노트 로터)는 “미국 번역가들이 (미국 정부가) 듣고 싶어하는 문장을 여러 곳에 삽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부분을 확인하려고 테이프를 몇번이나 들었지만 헛수고였다”라고 말했다. 오사마가 실제로 9월 테러에 관련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이 비디오가 증거물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에 따르면, 오사마가 테러에 개입했음을 밝히는 데 이 테이프보다 좋은 증거는 없으며, 이를 의심하는 것은 테러범들을 돕는 범죄가 된다. 그러나 <모니터>는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다. 이 점에서 ‘반 테러 전쟁’도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부시 정부에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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