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는 유로가 가소롭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e-sisa.co.kr)
  • 승인 200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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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단일 화폐, 경제 통합 지연 등으로 ‘경쟁 상대’ 되기에는 역부족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 몽드>는 1999년 1월4일자 1면 머리 기사로 ‘유로, 달러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내밀다’라는 이념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목을 뽑았다. 왜 그랬을까. 그 해 1월1일 프랑스와 독일이 주축이 된 유럽연합(EU)은 반 세기에 걸친 유럽 통합의 상징인 단일 화폐 ‘유로’를 세계에 선보였다. 당연히 유로와 달러의 가치 비교가 전세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런데 첫 외환 시장 거래 결과 놀랍게도 유로가 달러의 가치를 훨씬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1유로=1달러 17센트). <르 몽드>의 당시 제목은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 체제에 오랫 동안 불만을 품어 온 프랑스, 나아가 유럽연합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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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P연합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의 유로 단일 통화 상징 마크 앞에서 2002년을 맞이하는 ‘EU 소녀’.

그러나 호조를 보이며 출발한 유로는 이듬해 1월부터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유럽연합 경제에 전반적인 이상 조짐이 나타나고 물가 불안까지 겹쳐 유로의 달러 대비 가치는 2000년 1월 말 96센트까지 떨어진 뒤 끝내 회복세를 보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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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P연합
올 1월1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유로화를 들어 보이며 독일 베를린 광장에서 한 시민이 환호하고 있다.

그 뒤 유로는 소폭으로 등락을 거듭했지만 2000년 9월 84센트까지 내려갔고 지난해 10월에는 82센트까지 곤두박질했다. 유로는 출범 첫해에만 달러에 비해 약간 상대적 우위를 보였을 뿐 이후 2년간 줄곧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지난해 12월28일 마지막 외환 시장에서 달러에 대한 유로의 가치는 88센트였다.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자신만만하게 내민 유로가 약세를 면치 못하자 유럽연합의 자존심이 구겨진 것은 물론이다.


2002년 들어서 유럽연합이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의 유로 대 달러의 격돌이 전초전이었다면 올해부터는 본경기다. 사실 유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외환시장·주식 시장·은행·기업 등의 컴퓨터 단말기에나 등장하는 일종의 전자 화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 1월1일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유로는 유럽연합 12개국(유로에 불참한 영국·덴마크·스웨덴까지 합치면 15개국) 3억5백만명이 일상적인 거래에서 사용하는 법정 화폐다. 프랑·마르크·리라 따위 기존 화폐는 사라졌다. 유로에 대한 잠재 수요를 반영하듯 1월2일 뉴욕 외환 시장 첫 거래에서 유로는 지난해 12월28일 달러 대비 종가(88센트)보다 1센트 이상 올라 90센트 가까이에 거래되었다. 3년 전처럼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것이다.


3년 전 많은 유럽 정치인들은 머지 않아 유로가 달러를 대신해 세계 기축 통화로서 자리를 굳힐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들은 유럽연합 전체 인구와 경제력을 감안할 때 유로가 달러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당시 유럽 정치인들은 달러가 세계 실물 경제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힘을 외면했다. 국제청산결제은행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말 기준으로 달러는 전세계 외환 시장 거래량의 90%를 차지했다(하루 평균 1천2백억 달러). 이에 비해 유로는 30%에 그쳤다. 유로의 상대 거래 통화도 대부분 달러였다. 일본 엔화는 10% 미만.


달러는 또 미국 이외의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어떤 통화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남미의 파나마·에콰도르에서 달러는 자국 통화를 대신하는 단일 통화이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법정 통화로 사용된다. 러시아와 이스라엘,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중동국에서도 달러는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 게다가 국제 상품 거래 대금은 대부분 달러로 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원유가 대표적이다. 또 한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 중앙 은행도 달러를 외환 보유고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유럽연합의 단일 화폐 유로가 달러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이 꼽는 첫째 원인은 회원국마다 각기 다른 경제 구조와 그에 따른 완전한 경제 통합 지연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통화 정책에 관한 권한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쥐고 있다. 문제는 유럽중앙은행이 단일 통화 정책을 취한다 해도 12개 회원국의 법 체계·경제 구조·언어·역사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가 한결같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유럽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은 실업률이 높은 회원국에 도움이 될지 모르나 실업률이 낮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인플레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학자 호르스트 쾰러는 유로가 유럽연합의 금융 시장을 통합하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경제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반해 미국은 50개 주가 달러라는 단일 화폐를 사용하고, 경제 구조도 유럽연합에 비해 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이다. 게다가 경제 규제가 덜하다는 이점도 있다.


유로의 약진을 가로막는 또 다른 원인으로, 유럽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비효율적이고 불확실하다는 점이 꼽힌다. 과거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은 인플레가 우려된다며 그 요구를 외면하기 일쑤였다. 유럽중앙은행은 개별 회원국 사정보다는 회원국 전체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 한 해 동안 무려 열한 번이나 금리 인하를 단행했을 정도로 위기가 발생하면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처한다.


과도한 복지비·실업 등으로 장래 밝지 않아


또 하나 유로 약세의 요인은, 유럽연합의 정치적 장래를 투자가들이 여전히 불안해 한다는 점이다. 워싱턴의 저명한 민간 경제연구소인 국제경제연구원(IIE)의 에드윈 트루먼 선임연구원은 “유럽 통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을 동유럽에까지 확대하는 문제를 포함해 아직도 이 지역의 정치적 장래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10년 전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현재 시장 경제로 넘어가고 있는 동유럽국 13개 나라들이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할 경우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많은 투자가들이 미국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유로의 장래는 어떤가. 미국 조지타운 대학 배리 아이천그린 교수는 앞으로 유럽과 아시아·남미의 교역이 증가하면 달러보다는 유로화 거래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 국제경제연구원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유럽중앙은행과 유로가 시장의 신뢰를 얻는 순간 달러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의 경제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유럽연합의 높은 실업률과 노령화에 따른 과도한 복지비 지출 등을 들어 유로가 달러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지난 한 해 유럽연합의 평균 실업률은 7.6%에 달했다. 이런 문제까지 겹칠 경우 유로는 결코 달러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새뮤얼슨의 진단이다. 과연 어느 쪽 말이 맞을지 좀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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