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국제화’ 시동 걸었다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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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전세계에 <아리랑> 공연 개방…외국의 평가·경제 효과 등 탐색

새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창작되는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특색 있고 희한한 걸작품. 국적에 관계없이… 각 나라의
(관람) 대행사 모집. 어서 오시라, 평양으로!’



북한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보자면 참으로 희한한 광고 문구다. 자본주의
관광회사의 선전 문구를 연상케 한다. 4월 말에서 6월 말까지 장기 공연을
예고한 북한의 ‘아리랑 축전’. 이 축전의 해외 관광객 유치를 담당하는
`‘범태평양 조선민족 경제개발 촉진 협회’(범태·베이징 소재)의
인터넷 사이트(dprkorea.com)에 올라 있는 문안이다.


김정일, 공연 명칭 <아리랑>으로 바꿔


올해 상반기는 북한이 국력을 모아 치르는 3대 행사 ‘60/90/70’(김정일
위원장 60회 생일인 2월16일,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인 4월15일, 인민군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4월25일)이 겹쳐 있다. 이 때를 겨냥해 북한이
뭔가 빅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지난해 중반 이후 조금씩 흘러나왔다.
지난해 10월께에는 `‘아리랑 축전’이라는 행사명이 나왔다.


 



마치 베일이 벗겨지듯 그동안 조금씩 나온 얘기들을 종합하면 그
개요는 대략 이렇다. 우선 10만명이 동원되는 `‘대집단 체조와 예술
공연’이다. 공연 장소는 능라도 5·1경기장. 형식은 2000년 10월
노동당 창건 55주년에 공연한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연상케
한다. 4개의 장과 서장·종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같다. 다만
극 구성의 최소 단위인 ‘경’이 다르다.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13경인데 아리랑은 10경이다.


<아리랑>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눈길을 끄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해 12월19일자 연합통신은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부소장이자
조총련 공연기획자인 리철우씨(64)를 인터뷰했다. 당시 리씨는 <아리랑>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주목할 만한 증언을 했다. 실무진이 처음 보고한
명칭은 김일성 주석을 상징한 <첫 태양의 노래>였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아리랑>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정치색을 배제하고
민족적인 공연이 되도록 하라는 의지가 담겼다는 것이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1월1일자에서 <아리랑>이 ‘국제 사회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와 ‘민족 단합과 평화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치색 배제하고 민족적 내용으로 재구성


그러나 이런 설명들은 북한을 ‘사시’로 바라보는 국내외 언론의
공격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 1월23일자 <LA 타임스>는 서방
외교관 말을 인용해 ‘남한 사람들이 이 축전에 참가하는 것은 미국인
존 워커가 탈레반을 위해 싸우는 것과 같다’는 식의 묘한 논리를 펼쳤다.
그 서방 외교관이나 <LA 타임스>가 2000년 10월23일 북한을 방문한
자기 나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 대해 입을 다문 것은 물론이다. 당시
올브라이트는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의 모태이면서도
정치색이 월등히 강한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관람하면서 ‘놀랍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알려졌다.


국내 언론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1989년 평양축전이 열렸음을
상기시킨다. 이번 <아리랑> 역시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는 남측의
월드컵 행사를 겨냥한 맞불 지르기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렇게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들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아리랑>은 최종안이
확정될 때까지 몇 차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북한의 공연 담당자들이
올해 행사를 대규모로 치르자고 의견을 모은 것은 지난해 5월이었다.
최소한 4월까지는 방문자들이 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5월에 매스게임
준비에 착수하면서 행사 규모를 키우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8월 말까지 실무 단위에서 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었다. 행사의
명칭과 성격·효과·비용 조달 방법 등이 초점이었다.


8월까지만 해도 1989년 평양축전이 모델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행사의 성격이나 방향에서 정치성이 강했다. 올해의 3대 행사인 6090
70과 6·15 2주년을 경축하자는 것이 당시의 취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자기들 잔치에 손님을 초청하는 꼴이니 비용도
자기들이 대는 것으로 했다. 여기까지라면 일부 언론 보도가 들어맞은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8월 말에서 9월 초 실무진 보고서가 상층부에
올라갔다. 상층부 검토 과정에서 한 차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정치 행사 일변도여서는 안된다는 검토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아리랑 축전에더 복합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우선 북한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고, 앞의 <조선신보> 보도처럼 국제 사회를 향한
평화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내용이 가미되었다. 그리고 이 행사를
통해 관광산업 발전 등 경제적 실리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8월 말에서 9월 초 상층부의 검토 의견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되었다.
북측 관계자들을 접촉한 국내 공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때 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났다. 내용을 보완하거나 부분 수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변화였다고 한다. 우선 리철우씨 얘기처럼
<아리랑>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대본도 정치색을 배제하고 민족적인
내용으로 다시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호 개방 대비한 ‘내구력’도 점검


또 한 가지. 행사 규모를 확대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10만명을 동원하는
대집단 체조, 그리고 북한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역량을 총화해서 보여주자는
개념이 새로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지시 사항이 있었다.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전부 받아들이라’는 내용이다. 직전까지만
해도 해외의 친북 단체나 북한이 초청하고 싶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획기적인 변화였다. 앞의 ‘범태’ 사이트의 대담한 광고 문구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김위원장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특히 마지막 부분을
주목한다. ‘전부 받아들이라’는 내용이다. 바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올브라이트 방북 때의 그의 발언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이후 김위원장은 때를 기다려 왔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해 소강 국면을 거친 북한 지도부는 올해를 ‘북한식 국제화의
원년’이라고 본다. 그 북한식 국제화의 한복판에 <아리랑>이
있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국제화한 북한으로 나가기 위한 일종의
‘백화제방’일 수 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지적·예술적 역량을
모두 드러내 놓고 국제 사회가 이를 어떻게 평가하며, 또 경제적 효과가
있는지를 보겠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문호 개방을 앞두고 북한 사회의
내구력을 점검하는 기회도 될 수 있다. 다목적 행사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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