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민 ‘집단 노이로제’ 징후
  • 뉴욕 · 정창래(자유기고가) ()
  • 승인 200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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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6개월, 불안·공포 일상화…최고 가치는 ‘안보’, 부시는 ‘영웅’
정적을 깨는 전화 소리에 스티브 커틀린(52)은 눈을 떴다. 워싱턴 DC에 사는 아들이었다. “어디 있으세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아들이 물었다. 뉴저지 중부의 말보로 시에 사는 그는 여느 아침처럼 통근 버스를 타고 맨해튼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들은 42번가 버스 터미널의 남쪽 건물에 폭탄이 든 상자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출입을 통제한다고 전했다. CNN 방송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마침 그 전날인 2월11일 연방수사국(FBI)이 빠르면 12일쯤 미국을 겨냥한 또 다른 테러 기도가 있을 수 있다며 전국에 경계령을 내렸던 터라 바깥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주위 승객들이 커틀린이 전화하는 내용을 전해 듣고 너도나도 핸드폰을 꺼내 미친듯이 번호를 눌러대고 있었다. 뉴욕 경찰이 폭탄 상자의 내용물이 전선이 삐죽 나온 고장 난 핸드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교통을 정상화하기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9·11 테러 이후 거의 6개월이 지난 현재 뉴욕은 이전의 모습을 거의 되찾은 듯하다. 거리는 다시 차와 인파로 넘쳐나고, 시민의 옷차림은 유독 따뜻한 올 겨울의 날씨만큼 풀려 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면 익숙한 코미디 프로와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추가 테러에 대한 경고가 때때로 긴장을 유발하지만 9·11 테러 직후에 팽배했던 사회적 공황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동북아 3개국 순방 이후 부시 대통령도 국내 이슈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이제 미국 사회가 9·11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화하고 있다는 성급한 판단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과 달리 미국 국민들의 심리 상태는 크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1963년부터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온 여론조사 기관 루 해리스의 로버트 라이트먼 조사팀장은 미국 사회가 혼란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을 앓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통 마비나 기계 고장으로 터널에 갇히게 되는 경우 예전에는 단순하게 ‘짜증 나는 일’로 넘겼으나 이제는 테러의 위험이 없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이 반복되면 집단 노이로제에 걸릴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안보 위해서라면 프라이버시 포기할 수 있다”




안보 의식도 크게 달라졌다. 미국은 지난 6개월 동안 눈에 띄게 안보 태세를 강화해오고 있다. 미국 의회는 9·11 직후 테러범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연방수사국에 임의로 개인 전자 우편과 전화 내용을 엿보고 엿들을 권한을 부여했다. 정부기관들은 그들의 웹사이트에서 민감하다 싶은 내용은 지워버리고 있다. 공항과 공공 건물 곳곳에서 경찰관과 무장 군인이 검색을 강화하고 있고, 비행기 기내에는 사복 안전요원이 탑승하고 조종실 문에는 철제 잠금 장치를 설치했다. 또한 9·11 이후 신설된 국가안보국(Homeland Security Office)과 연방수사국은 테러에 대비해 수시로 경계령을 내리고 있다.


사기업들의 안보 태세도 주목할 만하다. 중소 기업 이상 규모의 업체들은 외부인 출입 통제는 물론 자체 직원의 출입도 엄격히 검사하고 있어 신분증 없이는 출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감시 카메라 설치, 사설 경비회사와의 계약이 늘어나 보안업계가 특수를 맞고 있다. 미국 국민들의 개인적 안보 태세도 만만치 않아 총기 소유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지난해 11월 1천13건, 12월 첫 2주 동안 9백74건의 총기 소유 신청서가 쇄도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4배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층 강화되는 무장 체제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는 범국가적 감시망에 대한 비판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무기 소지는 개인의 신변 위협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며, 안보를 위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언론 보도와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미국 국민의 태도이다.


안보 최선주의와 더불어 미국 국민의 급격한 태도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정부에 대한 그들의 신뢰도가 급상승했다는 점이다. 본래 미국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정부를 신뢰하는 국민이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70%에 가까운 국민이 연방 정부가 거의 모든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전 실패,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닉슨 대통령 탄핵, 석유 파동과 경제 불안을 겪으며 1990년대 중반 미국 국민의 20%만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밝혀, 세계의 민주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을 나타냈다.


그러나 9·11 테러는 미국을 애국심의 도가니로, 부시를 영웅으로 만들어놓았다. 9·11 이후에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90%가 정부를 신뢰하고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부시였다.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9·11 테러 이전에는 국민의 50%가 부시 대통령의 정책 수행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최근에는 부시에 대한 지지도가 90%로 수직 상승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CNN·갤럽이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39%가 부시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2위는 5%를 기록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었다.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인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부시는 인기가 좋다. 지난 1월 워싱턴 DC의 진보 여성단체들이 18∼25세 대학생 6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75%가 부시의 9·11 테러 대처가 성공적이었다고 응답했으며, 부시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수치는 65%였다.
부시 행정부는 여론의 높은 지지율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한 예로, 2월 초 언론사들이 부시 행정부가 전쟁과 관련된 정보 유출을 과잉 규제한다고 항의하자 백악관 대변인 아리 플라이셔는 “국민은 부시 행정부가 언론에 정보를 너무 많이 준다고 항의하는 판이다”라고 반박했다.

국방부가 일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과 손잡고 테러와의 전쟁을 군인의 처지에서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만들어 ABC 방송사 등을 통해 방영할 계획이라는 보도도 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2월24일 논평을 통해 ‘국방부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중립적인 언론 보도를 돕지 않으면서 군대를 할리우드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고 비난했지만 국방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반 테러 분위기와 부시의 높은 인기는 의회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에도 이용되고 있다. 부시는 9·11 이전에 민주당이 주도하는 상원에서 자신의 에너지 정책과 감세 정책이 번번이 견제를 받는 수모를 겪은 바 있다. 올해 의회에 제출한 2003년 회계 연도 예산안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지나친 군비 증가 등을 이유로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민주당이 부시가 ‘승전 대통령’으로 승승장구하게 내버려 둘 리 만무하다. 하루빨리 국민의 관심을 국내 상황으로 몰아가려고 할 것이다.


부시, 90% 지지도 유지할 ‘카드’ 많아




지난 1월29일 부시가 국정연설에서 이란·이라크·북한을 강도 높게 몰아붙인 것은 국내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부시는 2월 중순 동북아 3국 순방에서 그같은 강경 발언의 의미를 희석하려는 인상을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부시는 자신의 국내 정책을 설파하고 11월 중간 선거에 나설 공화당 후보들의 선거자금 모금 행사에 참가하는 등 국내 상황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 국민의 심리 변화가 얼마나 더 부시의 비상을 받쳐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9·11 테러의 희생자 추모식을 방불케 한 미식축구 리그 NFL의 슈퍼보울 경기와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의 영웅 만들기 잔치도 끝난 현시점에서 미국인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불안한 하루’이다.


그러나 부시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이 아직 묘연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기치 아래 사담 후세인 제거 작업에 나설 수도 있다. 또한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는 미국 내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도 색출해야 한다. 90% 지지도를 유지할 소재는 많다는 이야기다.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한다면 재선은 물론 미국을 테러리즘의 위협에서 구해낸 후세에 길이 기억될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스캔들로 얼룩졌던 클린턴 대통령을 비꼬듯 백악관과 대통령의 위엄을 다시 세우겠다고 공언해 온 부시가 생각해 보았음직한 시나리오이다.


미국 사회는 모래가 끼고 군데군데 이가 빠진 톱니바퀴처럼, 매끄럽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혼란에 대한 노이로제를 치유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미국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답은 당분간 부시의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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