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 속 일본 경제 은행 저축도 못 믿는다
  • 도쿄 · 유재순 (르포라이트) ()
  • 승인 200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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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부터 ‘예금 전액 보호제도’ 폐지…“미국과의 베팅만이 살길”



얼마 전 젊음과 패기로 단도직입적이고 공격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정부를 맹렬하게 추궁해 제2의 다나카 마키코라고 불린 사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이, 정책비서의 위장 급료를 유용했다가 들통 나 의원 직을 사퇴했다.
그러자 일본 국민은 쓰지모토 의원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누가 일본 국민의 입이 되고 눈이 되어 정부를 감시해 줄 것인가 하며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쓰지모토 의원은 최근 몇 년 동안 안개 속 같았던 일본 정치를 가장 알기 쉽게, 그리고 국민의 가려운 부분을 속시원하게 긁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이 쓰지모토 같은 국회의원을 선호한 것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1990년대를 정신적으로 보상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면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왔다. 언론은 공식적으로 ‘최악의 경제 불황’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일본 언론을 비롯한 외국 언론들은 2002년 3월 일본에 전후 최대의 위기가 올 것이라고 지난해부터 떠들어 왔다.



하지만 일본 국내외의 ‘기대’와 달리 지난 3월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일이라면 앞서 언급한 정계의 신데렐라 쓰지모토 의원이 사퇴했을 뿐이다.
일본인들에게 지난 1980년대는 영원히 잊지 못할 노스탤지어다. 이같은 일본인들의 의식 구조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골고루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다. 그 전형적인 모델이 지난번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이었다. 거기에 출전한 일본 선수들의 나이는 25세 이상이었다. 스키에서는 무려 서른일곱 살이나 되는 노장 선수도 출전했다. 하지만 일본인, 특히 일본빙상협회 임원들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출전 선수들은 4년 전 나가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노 골드로 끝난 것이다. 이를 두고 아사히 텔레비전의 사회부 데스크인 구마가이 씨는 이렇게 꼬집었다.
“일본은 경제 분야에서만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 여고생들이 나란히 금·은 메달을 딴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구조 개혁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 바꾸기 아닌가?”



제조산업국 일본은 없다



일본에게 미국은 애증의 대상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 미국에 무릎을 꿇어야 했는가 하면, 전후 6년8개월 간은 맥아더 연합군사령부(GHQ)에 지배되는 수모를 겪었다. 때문에 대다수 일본 국민의 의식에서는, 미국을 이기고 세계 1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 대국이 되었을 때 일본은 너무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일본 경제를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와세다 대학 상학부 교수인 야마키 가즈히코 교수의 말이다.
야마키 교수는 일본의 엘리트 집단이 일본 경제를 망쳤다고 성토했다. 지금까지 일본 국민은 도쿄 대학을 나온 관리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들의 말이 전부인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도착 지점은 깊은 수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조산업국인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외국에서 값싼 물건을 수입해 온다. 동네마다 성황을 이루는 100엔 코너에는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상품 가짓수만도 4만여 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메이드 인 저팬`은 거의 없다. 이는 자연스럽게 일본 국내 제조기업 도산으로 이어졌다. 지난 1년 동안 도산한 기업은 1만6천5백52개. 이어서 일본 은행들의 부실 채권이 36조8천억 엔으로 늘어났다. 실업률도 전후 최대인 5.6%.



하지만 일본 국민은 이같은 일본 언론의 요란한 엄살에 감각이 무디어진 지 오래다. 또한 3월 붕괴설이니 일본 파탄이니 하며 경제 전문가들이 극단적으로 떠들어대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국민은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은행에 넣어둔 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개인 금융 자산은 자그마치 1천4백조 엔이나 된다. 하지만 이 돈은 일본인의 국민성만큼이나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인 일본 국민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들, 미국 움직임에 ‘촉각’ 곤두세워



“이제 정말 아무도 못 믿게 되었다. 정치나 경제 모두가 엉망진창인데 누구를 믿고 따르라는 말인가?” 1억 엔이 넘는 돈을 은행에 넣어 두었더니 이자는커녕 세금이 더 많이 나왔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스즈키 도루(54·생선도매업)씨는, 그래도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은행에 저축해 둔 돈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은행도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4월1일부터 `예금 전액 보호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1인당 천만 엔까지만 보상이 된다. 그래서 요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어떻게 하면 각 은행에 명의를 변경해 예금액을 분산함으로써 저축한 돈을 최대한 보호받을 수 있는지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국민의 반응이다. 이들은 이같은 소동을 겪으면서도 미국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일본은 독감이 든다. 거품 경제가 깨진 것도 미국이 엔화를 가지고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처지에서는 지금 자신의 혀처럼 놀아주는 고이즈미의 협력이 필요하니까 채찍보다 당근을 준다. 하지만 일본 주식 시장을 어떤 형태로 뒤흔들어 놓을지, 그리고 정치를 어떻게 뒤에서 죄어 들어올지, 그것은 전적으로 미국 기분에 달렸다. 미국이 일본을 가지고 어느 정도 흔드냐에 따라서 일본 경제가 정말로 위기가 될지 회생이 될지, 앞으로 2∼3년이 가장 큰 고비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분> 경제부 기자의 이야기다. 이렇듯 일본 경제는 자욱한 안개 속의 미로에 갇혀 있다. 또한 일본 국민은 철저하게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고이즈미 내각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여 년간 주식 투자에 전념해 온 오타 세이치로(59·중소기업 경영) 씨는, 중소기업인 20여 명이 모이는 연구회가 산출한 결론이라며 이렇게 들려 주었다.



첫째, 각 은행의 국내외적인 부실 채권 처리.
둘째, 부실 기업에 대한 과감한 구조 조정.
셋째, 제조산업 강력 육성.
넷째, 개인 금융자산 적극적인 소비 유도.
다섯째, 개인 금융자산 투자 유도.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미국을 절대로 자극하지 말고, 또한 미국과 아주 적절하게 정치적·경제적으로 베팅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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