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청산 ‘마무리 악수’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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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정상, 전략 핵무기 감축 등 합의…‘악의 축’에는 입장 차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근 정상회담은 냉전 시대 유산을 말끔히 청산하고, 신시대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미·러 양국 정상은 전략 핵무기 감축 조약과 양국간 군사·외교·경제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간 냉전적 대립·반목을 종식하고 신뢰·협력·화해의 관계로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 수뇌부는 러시아 방문과 정상 회담에 대비해 오랫동안 꼼꼼하게 준비해 왔다. 부시 행정부 외교팀은 기존 상식과 달리 러시아에 인간적으로 접근한다는 이른바 ‘본질적·인문적 방법론’을 채택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동양의 격언인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교훈 삼았다. 실용주의 철학에 기초를 둔 미국적 사고 방식이 아닌, 러시아 문학 작품 독파를 통한 러시아적 정서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여행’에 대비했다.






부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읽으며 러시아 연구



러시아를 방문하기 전 부시 대통령이 19세기 러시아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독파했다는 소문은 러시아인 사이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부시 대통령·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 보좌관·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백악관 수뇌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요 작품을 정독한 후 회의 때마다 서로 진지하게 독후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인의 정신·심리 구조를 심층적으로 이해·접근해 이를 외교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호감을 표시했고, 라이스 보좌관은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안에 형상화한 미국 이미지는 ‘악마의 자본주의 제국’이다.



백악관은 이번 유럽 방문에서 러시아의 친서방 정책을 적극 후원했다. 이는 부시 대통령의 방문 일정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순방은 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 순이었다. 유럽의 강국이자 미국의 동맹인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러시아 방문을 끼워넣었고, 방문 기간도 가장 길게 잡았다. 백악관은 러시아를 유럽의 구성원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군사·외교·정치 역학 구도에서도 러시아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5월23일 오후 8시 (현지 시각) 미국 대통령 전용기 편으로 브누코보 2 공항에 도착한 부시 대통령은 알렉세이 쿠드린 러시아 부총리의 영접을 받은 후, 이례적으로 리무진 승용차 앞좌석에 앉아 유서 깊은 수도의 동양적 분위기를 주의 깊게 돌아보며 숙소로 향했다. 공항 환영 행사에서 부시 대통령은 군악대 음악에 맞추어 경쾌하게 왼손을 흔들기도 해 신문 머릿기사에 ‘부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는 제목이 붙기도 했다.



5월24일 아침 부시 대통령은 무명용사 묘역에 헌화한 직후, 푸틴 대통령과 크렘린궁에서 정상회담을 했고, 저녁에는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 대통령 별장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이튿날 오전 푸틴 대통령의 고향이며 러시아 제2의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한 부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또 한번 비공식 정상 회담을 가졌고, 도심 관광지를 둘러본 후 2차 세계대전 희생자 47만명의 영령이 잠들어 있는 ‘피스카료프 묘지’를 예방해 헌화했다.






양국은 이번 정상 회담을 통해 냉전 유물 청산 작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군축 문제를 타결·합의했다. 지난해 6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정상회담 이후 11개월 만에 얻은 개가였다. 합의된 전략핵무기감축 조약(5개 조항)에 따라 양국은 현재 보유한 전략 핵무기 6천∼7천 기를 2012년까지 1천7백∼2천2백 기 규모로 축소해야 한다. 조약은 2012년까지 유효하고, 이후 문서로 수정·연장할 수 있다.



러시아측은 반대급부로 경제 협력 분야에서 톡톡히 이득을 챙겼다.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 도입, 러시아 투자 확대, 러시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양국간 무역 분쟁 해소, 첨단 산업 분야인 항공·컴퓨터 산업 협력 등에 합의했다.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양국간 교역의 장애물인 ‘잭슨-밴니크’ 법안(옛 소련 때 제정된, 러시아에 대한 무역 제재 법안) 폐지를 미국 의회에 요청하겠다고 약속받았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아름답게’ 끝난 것은 아니다. 이번 회담에서 두 정상은 ‘악의 축’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신경전을 벌였다. 부시가 러시아를 방문하기 이틀 전 백남순 북한 외무상이 모스크바를 급히 찾았을 때,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은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한 백악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며 북한을 안심시켰다.



‘악의 축’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양국 관계가 지금 당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우호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심각해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장단에 한반도 상황이 요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시가 러시아를 방문하기 직전, 북한 외무상 백남순이 한달음에 러시아를 찾아간 것도 이를 반증한다. 미·러의 냉전 관계는 이번 정상회담으로 공식 청산되었지만, 강대국의 질곡은 여전히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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