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핸드폰을 잡아라”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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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기업, 북한 이동전화 시장 선점…우리 기업, 남북 통신회담으로 ‘반전’ 노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제때 이루지 못하면 나중에 톡톡히 대가를 치른다. 남북한이 통신산업 협력을 처음 논의한 것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다. 당시 정부 고위 당국자가 베이징에서 북측 당국자와 깊숙한 얘기를 나누었다. 북으로서는 기간 산업인 통신 분야에서 남측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을 열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엉뚱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외국 회사가 파고들어가 선점한 것이다. 당시 태국의 록슬리라는 회사가 나진·선봉의 통신 사업권을 따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공화국 시절 이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고위 당국자는 가슴을 쳤다. “김영삼 정권이 민족 앞에 죄를 지었다”라며 그는 비통해 했다.





여타 기간 산업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통신 분야는 서로 표준이 달라지면 의사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통일이 되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지난 6월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통신회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회담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때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에도 통신 분야는 여타 분야와 달리 매우 조용했다. 남북 모두 준비가 안된 듯했다. 그러던 중 엉뚱한 데서 일이 터졌다. 지난해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상하이 방문. 김위원장은 중국 젊은이들이 너나없이 ‘손전화’(핸드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즉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년 태양절(4월15일 김일성 주석 생일)까지 평양시에 손전화를 개통하라.”
조선체신성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국내외 통신회사와 광범위한 접촉이 시작되었다. SK텔레콤의 실무조사팀이 평양을 찾은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의 다른 회사들 역시 개별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국내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 하나 적극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통신사업은 그만큼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특히 북한의 경우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SK텔레콤측의 2차 방북이 있었으나 그때까지도 ‘조사 연구 단계’라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국내 통신회사들이 마냥 여유를 부릴 만큼 상황이 한가롭지 못했다. 조선체신성을 비롯한 북측 실무진은 이미 김위원장의 지시가 떨어진 이상 어떻게든 실행에 옮겨야 했다. 체신성뿐 아니라 대외 채널들이 총동원되어 외국의 주요 기업들과 접촉하는 모습이 속속 드러났다.



역시 태국의 록슬리가 가장 앞서 나갔다. 우리 기업들이 발이 묶여 있는 동안 록슬리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북에 파고들었다. 록슬리는 나진·선봉에서 올해 7월부터 핸드폰 시범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평양으로 사업권을 확대하기 위한 조처까지 이미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도 록슬리와 북한의 조선체신회사가 동북아전화통신사(NEAT&T)라는 합작회사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경계할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평양에 기지국을 4개나 만들어 핸드폰 서비스를 위한 테스트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GSM 방식 채택하면 통일 후 ‘통신 분단’



록슬리도 록슬리지만 국내 통신업계는 유럽 기업들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지난해부터 도이치텔레콤을 필두로 해서 브리티시텔레콤·에릭슨 등이 북측과 접촉을 거듭했다. 이 중에서도 도이치텔레콤은 독일의 적극적인 북한 진출 의지에 힘입어 가장 진지하게 북측과 협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왜 이들의 진출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우리와 통신 표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 이동통신 시장은 유럽 표준인 GSM 방식과 한국이 종주국인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방식으로 양분되어 있다. 상업화가 먼저 이루어져 이미 유럽뿐 아니라 동남아까지 석권하고 있는 GSM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는 있으나 통화 음질 면이나 통화 수용 능력, 부가 서비스 능력 등에서 현저히 앞서 있는 부호분할 방식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특히 1996년 미국 퀄컴 사의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상업화에 성공한 한국 기업들이 바로 부호분할 방식 확산의 최선봉인 것이다. 현재 부호분할 방식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호주·이스라엘, 그리고 중국과 일본 일부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CDMA 벨트’를 구축해 최소한 한·중·일 3국에서는 자동 로밍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통신의 생명은 중간에 끊기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북한은 바로 ‘아시아 CDMA 벨트’의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북한이 GSM을 채택할 경우 결국‘이 빠진 동그라미’ 꼴이 될 수 밖에 없다. 통일 이후까지 염두에 둘 경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보통신부를 비롯해 국내 통신업체들이 지난해 말 컨소시엄을 구성해 대북 접촉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문제 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대북 협상에 참여한 국내 통신업계 관계자는 “GSM 방식과 비교해 우리가 한 발짝 처진 게 확인된 이상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6월의 남북 통신회담 직전까지도 GSM 방식을 끌어들여 통화 서비스를 시작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조선체신성이 태국의 록슬리 사와 별도로 ‘랜슬럿 홀딩스’라는 회사와 접촉해 왔는데, 내부적으로는 이 회사에 상당히 기대를 했다는 것이다. 랜슬럿 홀딩스는 록슬리와 마찬가지로 금융 투자회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중국의 통신 회사를 끌어들여 북한 통신 시장에 접근했으나 자금난으로 막판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북한대로 부호분할 방식보다는 GSM을 선호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과 미국이 종주국인 부호분할 방식을 택할 경우 기술 종속을 우려하는 것이다. 반면 GSM 방식을 택할 경우 록슬리나 유럽 기업들이 과연 한국만큼 해줄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사업권을 독점해 나중에 한국 기업에 비싸게 되팔거나, 최소한의 투자만 해놓고 수익성이 보장될 때까지 기다리는 정도일 것이다.



지난 6월4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통신회담은 이같은 복잡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담 이후 정보통신부나 국내 기업들이 일단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이 회담에서는 몇 가지 소득이 있었다고 한다. 북측 내부에도 ‘통일 이후까지를 고려해 부호분할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가시적으로는 1차 회담 이후 한달 만에 평양이나 베이징에서 2차 회담을 열어 기술 검토를 하기로 한 점도 큰 수확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반대 조짐도 나타나고 있고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최근 록슬리의 GSM 핸드폰이 평양에서 시범 통화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얼마 전 정보 기술 관계자가 평양을 다녀왔는데, 조선체신성 고위 관계자가 록슬리 핸드폰이라고 하면서 건네주기에 통화해 보았더니 잘 되더라는 것이다. 북한이 GSM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또 대남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도 확인된 것이다.



우리는 부호분할다중접속 방식 상업화에는 성공했으나 원천 기술은 미국의 퀄컴 사가 가지고 있다. 테러리스트 국가에 대해 전략 기술 이전을 금지하는 미국의 바세나르 협정이나 미국 상무국의 수출규제(EAR)와 충돌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지레 짐작이라는 소리도 있다. 이미 퀄컴의 원천 기술이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 버젓이 진출해 있는 마당에 북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다. 더군다나 미국이 남북 통신 협력을 가로막아 북한이 결국 유럽 표준을 채택하게 될 경우 두고두고 원망의 대상이 될 텐데 그렇게 하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미국이 부호분할 방식 핸드폰의 북한 진출을 북측과 흥정 테이블에 올려놓고 관계 개선을 위한 메뉴의 하나로 풀어가려 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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