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평화 ‘제3의 길’ 있다
  • 김진기 (함부르크 대학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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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에 ‘긴장 사건’ 맡길 수도…미국의 비준 거부 압력 물리쳐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2002년 7월17일 국제형사재판소(ICC) 규정 채택 4주년과 그 발효를 기념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1998년 7월17일은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국제 합의를 마침내 이룬 날로 기록될 것이며,…국제형사재판소 규정 발효는 국제 관계가 더 이상 힘이 아닌 법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가 이같은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단순한 국제 조약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반대할 뿐 아니라 한국과 같은 동맹국까지 가입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상 내정 간섭에 해당할 정도의 압력을 받은 한국은 아직 비준조차 못하고 있다.





미국, ICC 무력화 포기 안해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에 관한 최초의 합의는 유고 황제와 프랑스 외무장관이 테러에 희생된 후인 1937년에 이루어졌다(국제형사재판소 설치안). 하지만 이 조약안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발효되지 못하다가 대전 종료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임시(Ad-hoc) 국제전범재판소가 설치되어 잠깐 빛을 보았다. 당시 전범 피고인들을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범죄 혐의로 처벌했다.



그러나 이후 냉전 체제로 들어서면서 국제형사재판소는 또다시 유명무실해졌다. 냉전 종식 후 유엔 안보리는 1993년에는 옛 유고를 위해, 1994년에는 르완다를 위해 각각 임시 국제형사재판소를 설치했다. 두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 강간과 인종 청소라는 야만적인 전쟁 범죄를 단죄하려고 유엔은 헌장 제7장에 근거해 집단안전보장 수단의 하나로 재판소를 설치했다.



그뒤 유엔 총회는 1994년 유엔국제법위원회(ILC)가 제기한 국제형사재판소법 초안 마련에 들어갔다. 유엔은 이 과정에서 각 전문가 그룹과 외교회의를 거쳐 1998년 7월17일 찬성 120, 반대 7, 기권 21로 전쟁 범죄·반인륜 범죄·대량 학살(제노사이드)·침략 범죄 등 100여 가지 범죄의 처벌 요건을 명문화한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같은 상설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에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국제 사회가 경험한 임시 국제형사재판소 4개는 모두 미국이 주도해 설립했고, 덕분에 전범 재판 이후 다양한 국제인도법이 발전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참혹한 전쟁법 위반 사태에 미국이 침묵한 이후 오랫동안 국제법은 맥을 못 추었다. 미국은 미국인이 인질로 잡히면, 인질에 관한 국제 조약은 팽개친 채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 작전을 폈다.


또 미국대사관이 폭파당하면, 외교관 등에 대한 보호조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혐의가 있는 국가에 전폭기를 보내 폭격했다. 지난해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서도 국제법 관점에서는 민간 항공기에 대한 특별 보호를 규정한 국제 조약에 따라 충분한 법적 조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국제 조약 대신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응징 전쟁 카드를 끄집어냈다.





이러한 국제법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마련된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미국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 형사재판소는 미국인을 처벌하지 못하지만 상설 형사재판소는 미국인도 처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동안 외국 주둔 미군은 유럽과 아시아를 막론하고 특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미군은 특별 대접을 받기 어렵다. 거의 예외 없이 미군이 주둔한 곳의 화두는 미군 범죄이다.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 비체약국이지만 관할 확장 규정 12·13조에 따라 미국민도 국제형사재판소에 설 수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 보충성 원칙은 미국민에게 불리하다. 왜냐하면, 국제형사재판소 검사는 비체약국인 미국이 해당 피의자를 미국 법정에서 처벌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미국 법정의 조처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독일은 ‘독일인은 독일 외에서 처벌받도록 이송되지 않는다’는 기본법 제 16조 2항을 급히 개정해 국제형사재판소가 독일 국민도 처벌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쳤다.



미국이 주도한 유고 전범 국제형사재판소에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은 피고인으로 섰다. 밀로셰비치가 재판받는 장면은 전세계 폭압적 권력자들을 잠 못 이루게 했을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정한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 범법 행위를 한 자는 그가 테러리스트이든 병사이든 최고 권력자이든 지위에 상관 없이 처벌받는다.



그 때문에 존 니그로폰테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국제형사재판소가 미군에 대한 재판 면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보스니아의 평화유지활동 연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해 결국 1년 면제를 허가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세기를 풍미한 국제 정치인인 헨리 키신저가 체포될까 두려워 유럽 몇 나라에는 여행조차 가지 못하는,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국제법 혹은 국제 재판과는 무관하게 지내왔다. 필리핀·인도·중국 등이 도쿄 전범 재판에 자국의 판사를 보내 일본을 단죄하고 있을 때에도 최대 피해자인 우리는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만 가입해도 북한 도발 견제 가능



남북한은 50여 년이나 위험한 평화 상태를 유지해 왔다. 개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양측은 총론 없는 각론만 지루하게 되풀이했다. 헌법상으로는 북한이 반국가단체이지만 반대로 헌법 외에서는 더 이상 반국가단체가 아니다. 그 법적 공백 속에 장기 양심수·국가보안법·양심적 병역 거부·북파 공작원·국군의 양민 학살에 대한 의심,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대한민국 주둔과 그 지위협정과 같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히틀러가 주변국과 부전조약 혹은 평화조약을 체결해 놓고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듯이 평화협정이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제도화하기 위해 남북한이 평화를 유린하는 행위를 처벌할 강제 방식에 합의하고 이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휴전 이후 한반도나 제3국에서 남북이 저지른 평화 유린은 현행 국제형사재판소가 관할하는 범죄이다. 따라서 남북이 평화를 제도화하려면 국제형사재판소를 선택해야 한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것처럼 국제형사재판소에 동시에 가입하고,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남북한간 긴장 사건 수사권과 최소한의 재판권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양도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남북 사이에 합의되지 않으면 남한 단독으로라도 국제형사재판소와 특별 조약을 체결해 남한에 대한 북한의 도발을 처벌할 길을 열어야 한다.



거스 히딩크에게 한국을 맡긴 것처럼 국제형사재판소에 그러한 역할을 맡겨 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국은 양자 조약으로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회피하려고 하므로 머지 않아 한국에 비준 거부를 다짐받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거절할 논리와 명분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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