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일·소 수교’ 방식 따른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9.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교부터 하고 골치 아픈 문제 해결할 듯…일본, 경협 자금 20억 달러 선지급 가능성
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었던 일본과 소련이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국교를 회복한 것은 1956년. 그 해 10월19일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고노 이치로(河野一郞)·마쓰모토 순이치(松本俊一) 등 일본측 전권위원과 불가닌·셰피로프 등 소련측 전권위원이 ‘일·소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국교 회복에 대한 여러 방식 중 ‘런던 방식’과 ‘아데나워 방식’을 절충한 것으로 알려진 이 방식의 최대 특징은 ‘선 국교 정상화’에 있다. 즉 수교를 먼저 하고 여타 현안은 수교 후 시간을 가지고 논의해 정한다는 것이다.



일·소 공동선언의 합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즉 전쟁 상태 종결, 외교 관계 회복, 유엔 헌장 존중과 내정 불간섭, 일본의 유엔 가입 지지, 재소 일본인 송환과 소식 불명 일본인에 대한 조사·배상, 전쟁 청구권 상호 포기 등 10개 항에 합의했다. 그러나 양국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섰던 북방 열도 문제 등은 수교 이후로 미루어 두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미해결 상태다.



새삼스레 일본과 소련의 국교 회복 방식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 방식을 오는 9월17일 평양을 방문하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정일 위원장이 선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측 실무진이 그동안 북·일 수교의 모델로 비밀리에 검토해 온 방식이 바로 이 일·소 공동선언 방식인 것이다.



<시사저널>은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행 발표가 나온 직후 일본 정부 소식에 정통한 일본인 한반도 전문가로부터 이같은 내용을 입수했다. 그는 기자와의 국제 전화 통화에서 “일본과 북한이 그간의 비밀 접촉에서 합의한 가장 핵심 사항이 바로 수교를 앞당긴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 방북이 성사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재 북·일 간에 조기 수교 모델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일·소 공동선언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즉 고이즈미 총리 방북을 계기로 북·일 양국이 ‘선 수교, 후 현안 타결’ 방식으로 수교 문제를 우회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일본 언론의 최근 보도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의 얘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게 된다. 일본 정부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아사히 신분>에서 그 ‘편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9월4일자 <아사히 신분>은 ‘고이즈미 총리가 오는 17일 평양에서 열리는 북·일 정상회담에서 수교 교섭 재개에 합의할 경우 조기에 협상 타결을 시도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그 다음 9월6일자에서는 몇 발자국 더 나아갔다. 북·일 양측 실무자들이 9월17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을 경제 협력 방식으로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공동 성명 내용에 합의하고 이미 문안 작성 작업에 돌입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아사히 신분> 보도에 따르면, 공동선언문에는 △일본은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 담화문 수준에서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하고 북한 공작선 추정 괴선박 사건 재발 방지를 요구하며 △양국이 서로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이 경제 협력 방식으로 과거를 보상하고 △북한은 미사일 발사 실험을 계속 동결하고 일본인 납치 의혹 문제에 인도적으로 대응한다는 등의 6개 항이 포함된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 나기 전에 속전속결”



여기서 핵심이 되는 내용이 바로 ‘일본과 북한이 서로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이 경제 협력 방식으로 보상한다’는 조항이다. 바로 이 재산청구권 포기, 경협 방식 보상이라는 내용 때문에 일부에서는 1965년 한·일 수교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공동선언’ 형식으로 수교를 먼저 선언하고 나서 배상 문제를 시간을 두고 협의한다는 점에서 일·소 공동선언 방식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소 공동선언 방식의 최대 특징은 양측이 수교 성립의 최소 조건만 합의하면 곧바로 수교로 돌입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같은 방식에 대해서는 북한측도 이미 1990년대 이후 몇 차례 수교 협상 과정에서 제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양측이 이처럼 수교 성립 자체에 무게를 두고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의 일본인 전문가는 ‘일본의 시각’으로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우선 기존 수교 협상이 안고 있는 폐단을 지적했다. 양측이 각론에 대해 갑론을박할 경우 회담이 최소한 1∼2년 이상이 걸리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 강경파의 움직임으로 보면 늦어도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미국이 이라크를 전면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강경파가 미국의 대내외 정책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이 경우 일본도 대북 협상에 나서기가 쉽지 않게 된다.



북한은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미국의 강경파는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며 기세를 올릴 것이고 북한 역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 개시되기 전에 북·일 양국이 수교하게 되면 미국도 함부로 북한을 공격하기 어렵고, 또한 북·일 관계를 발판으로 삼아 북·미 관계를 개선할 길도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이 밖에 북한 시장 개혁에 따른 외부 자금 수혈 필요성 등도 그 배경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번 북·일 수교 협상은 ‘데드 라인’을 설정해두고 협상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예전과 크게 다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기 전, 즉 늦어도 올해 말까지가 바로 데드 라인이다. 다시 말해 북·일 양국이 늦어도 올해 안에는 수교 상황에 도달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바로 고이즈미 평양행의 전제인 셈이다.



따라서 9월17일의 북·일 정상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조기 수교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확인하고 양국 현안을 포괄적으로 타결하겠다는 입장에 합의하는 데’ 주안점을 두게 될 것이다. 또한 양국 외무 당국자에게 수교 협상을 서두를 것을 지시하는 모양새를 갖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외의 상황이 조성될 수도 있다. 그동안 양국 실무진의 사전 조율 과정이 매우 깊고 신속하게 진행되어 왔고, 김정일 위원장이나 고이즈미 총리 모두 ‘돌출적’인 개성의 소유자라는 면에서 속전속결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국 정상이 9월17일 회담 결과를 토대로 곧바로 ‘수교 선언’을 해버리는 상황을 말한다. 이 경우 북한 일본뿐 아니라 주변국 모두 충격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두 정상이 자제력을 발휘해 수교 문제를 실무 협상 테이블로 넘긴다 해도 시간이 매우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일·소 공동선언에서 보인 것처럼 최소 조건의 타결을 전제로 수교에 들어가고 나머지 시간이 걸리는 현안은 수교 이후로 미루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북·일 양측의 최대 현안은 일본측 처지에서 보자면 일본인 납치와 미사일 문제 두 가지다.






앞의 일본인 전문가는 “일본 처지에서는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납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첫 관문이다. 그 다음 미사일 문제 해결이 두 번째 관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납치 문제가 미사일 문제보다 훨씬 쉽다는 얘기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납치 문제는 북·일 양측이 조금씩 조정하면 되지만 미사일 문제는 미국과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한 미사일 문제와 일본의 대북 배상 문제 역시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


북·미간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일본이 배상금을 지급하게 되면 군용으로 전용된다는 시비뿐 아니라 미국의 대북 협상력이 현저히 저하되기 때문에 이는 미국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다. 결국 북·일간 배상 문제 해결을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할 경우 북·미간 미사일 문제 해결 이후로 넘겨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경우 예전과 달라질 것이 없다. 수교가 한정없이 늦추어진다.



수교 전 평양에 일본 연락사무소 개설할 수도



바로 이 점에서 배상 문제 해결을 수교 이후로 미룬 일·소 공동선언 모델이 각광받게 된 것이다. 즉 일본측의 두 가지 조건 중 하나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수교를 선언하고, 또 하나의 문제인 미사일 문제는 배상 문제와 북·미 관계 등과 연동해 그 이후로 미루는 방식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최근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부쩍 이 문제에 자신감을 보인 이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다면 북한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 측에서는 이번 협상에서 쫓기고 있는 쪽은 북한이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북한은 이미 최근 러시아·중국·유럽까지 끌어들이는 폭넓은 외교를 통해 미국의 공세에 대비한 단단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오히려 외교적으로 최근의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시베리아 공동개발 및 한반도 철도 연결 등 일본의 이해가 걸린 현안들에 대해 공세의 고삐를 거듭 당겨왔다. 일본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는 북한에 지불해야 할 반대급부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돈 문제다. 북·일 및 북·미 관계에 정통한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고이즈미의 평양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북·일이 선금 지급에 대해 의견이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선금이란 앞으로 북한이 받을 배상금 중 일부를 일본이 미리 당겨서 주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비공개 협상 과정에서 일본측이 약 20억 달러를 북측에 일시불(at sight, 전문 용어로 일람불이라고 함)로 지급하는 문제가 거의 합의된 상태라고 한다.



북한이 최근의 시장 개혁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해 당장 필요로 하는 자금이 약 10억 달러라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따라서 약 20억 달러가 유입될 수 있다면 북한으로서는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된다. 이 전문가는 나머지 배상금 지급도 과거 한·일 수교 때보다 훨씬 앞당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수교 문제가 이토록 빨리 본격화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측이 대북 접촉의 최대 목표로 잡았던 것이 바로 ‘일본 연락사무소 평양 진출’이었다. 최근 대북 관계에서 별다른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는 미국은 일본 연락사무소가 진출할 경우 이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바로 이 상주 연락사무소 문제와 수교 전 일부 자금 선지급 문제가 수면 아래에서 맞교환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수교 선언이 이어지고 북·미간 미사일 회담과 연동해 배상 협상이 타결되는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