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테러 커넥션에 세계가 떤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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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무장 조직들 ‘거미줄 연계’…알 카에다와 ‘반미 성전’ 공동 전선
모든 테러 사건에는 조직과 배후가 있다. 지난 10월12일 인도네시아의 국제 휴양지 발리 섬의 한 나이트클럽을 피로 물들인 차량 테러 사건과, 곧이어 발생한 필리핀 남부의 연쇄 테러 사건도 또 다른 테러 배후의 이름을 드날리게 할 참이다. 9·11 테러가 알 카에다와 이 조직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을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했듯이. 비록 오사마와 알 카에다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 역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충격적인 테러를 저질러 자기네 존재를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 최대의 이슬람 테러 조직으로 손꼽히는 제마 이슬라미야(‘이슬람 집단’이라는 뜻)도 그 중 하나이다. 지난 5월 미국 국무부가 펴낸 〈세계 테러리즘 유형〉(2001도판)에 따르면, 제마 이슬라미야는 최근 몇년 동안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동남아 전역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각국 정부로부터 집중 감시를 받아온 국제 테러 조직이다.


세포 단위로 활동하는 이 조직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지난해 9·11 테러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반미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조직은 1999년 싱가포르에서 미국의 각종 시설물을 동시 공격하기 위해 대상 건물들을 비디오로 녹화하는 등 수 차례 테러를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미국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조직은 또 테러용 사제 폭탄을 만드는 데 쓰이는 암모니아 질산염을 무려 4t이나 구해 어디론가 빼돌린 일도 있다.


제마 이슬라미야, 발리 섬 테러 배후로 지목돼


발리 섬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인도네시아는 물론 말레이시아·필리핀 등 주변국은 이 사건의 ‘배후 조직’으로 일제히 제마 이슬라미야를 지목하면서, 동시에 ‘배후 인물’로 이 조직의 정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아부 바카르 바쉬르를 꼽았다.


예멘인의 후예로 1938년 자바 섬 동부 좀방에서 출생한 바쉬르는, 겉으로는 자바 섬 솔로 시 근교 엔그루키에서 이슬람 기숙학교를 운영하는 인자한 교육자이다. 하지만 이력서를 들추면 ‘무시무시한’ 전력이 곧 드러난다. 그는 이슬람 민병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1978년부터 약 5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직후 그는 또 정부 전복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자 이웃나라로 도피했다. 이후 1998년 다시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해외에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폭력 운동, 이른바 ‘다룰 이슬람’에 투신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중동과 아프리카·아프가니스탄을 오가며 ‘성전 세계화’에 청춘을 바치는 동안, 바쉬르 또한 동남아를 무대로 이슬람 급진주의 개화에 몸을 바쳤다.





발리 섬 사건 직후 바쉬르는 자기가 테러 배후라는 세간의 의혹을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바쉬르는 최근까지도 9·11 테러의 장본인인 오사마 빈 라덴을 ‘진정한 무슬림 전사’라며 공공연히 찬양한 바 있다. 또 바쉬르가 이끄는 제마 이슬라미야는 그가 찬양한 알 카에다와 연계해 동남아시아 역내 이슬람 테러 조직을 단일 대오로 묶어내는 이른바 ‘코디네이터’ 노릇까지 해온 흔적이 역력하다.


동남아 각국 수사 당국은 제마 이슬라미야가 국제 테러망을 조직하기 위해 라스카르 지하드·자유 아체 운동(인도네시아)·모로 이슬람해방전선(필리핀)·아부 사야프(필리핀) 등 수많은 이슬람 테러 조직과 접촉해온 것으로 파악한다.


이사무딘은 <타임> 표지 장식할 정도로 ‘악명’


아울러 각국 수사 당국은 바쉬르와 제마 이슬라미야가 최근 수년간 미수에 그친 테러 계획은 물론, 실제로 실행에 옮겨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낸 테러 사건과도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인도네시아 경찰은 2000년 8월 인도네시아 주재 필리핀대사관저 폭파 사건에 바쉬르가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잡고 있다. 싱가포르 수사 당국도 현재 싱가포르 주재 미국대사관 폭파 계획 연루자 등 제마 이슬라미야 단원 35명을 구금 중인데, 이들 중 몇몇이 바쉬르를 자기네 지도자라고 밝힌 진술을 확보했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테러 조직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좀더 확실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미국 처지에서 볼 때 바쉬르 뺨치게 악명 높은 인물로는 역시 인도네시아 자바 섬 출신인 리두안 이사무딘이 꼽힌다. ‘하발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사무딘은 알 카에다 네트워크의 ‘아시아 핵심 고리’로서 지난 4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던 인물이다.


당시 〈타임〉 보도에 따르면, 그는 9·11 테러 때 자살 테러에 합류하려다가 잡혀 ‘스무번째 테러범’이라는 별명이 붙은 자카리아스 마사우이와 2000년께 만난 일이 있었으며, 마사우이가 항공기 납치를 위해 미국에서 비행 훈련을 받는 데 필요한 서류를 제출할 때 보증서를 꾸며 주기도 했다.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은 물론 말레이시아·필리핀 등 동남아 4개국 수사 당국은 그를 지명 수배 중이다.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인 하발 리가 국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대 후반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옛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1990년대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테러 지도자로 활동한 그는, 그 무렵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시절 무용담이며, 오사마 빈 라덴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추종자들에게 자랑 삼아 늘어놓으며 ‘투쟁 의욕’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지역에는 이들 외에도 필리핀 남부에서 분리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아부 사야프·모로 이슬람 해방전선과 말레이시아를 기반으로 한 쿰플란 무자히딘 말레이시아(KMM) 등 수많은 이슬람 과격 조직들이 ‘반미 성전’을 외치며 테러를 일삼고 있다. 이 중 2000년 4월 마닐라의 한 휴양지에서 외국 관광객 10명을 포함한 21명을 붙잡아 인질극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아부 사야프는 필리핀 정부의 크나큰 두통거리이다. 지난해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에 미군 특수부대 일시 주둔을 미국 정부에 요청한 것도 직접적으로는 아부 사야프 근절을 겨냥한, 이른바 ‘반테러 전쟁’의 일환이었다.


발리 섬 폭탄 테러 사건 직후 미국은 동남아 일대를 ‘제2의 반테러 전선’으로 선포했지만, 이 지역 이슬람 세력이 원래부터 알 카에다와 친했거나 미국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동남아 이슬람 세력의 배외주의 물결이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무자헤딘 운동’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이 반테러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일대에서 수행했던 군사 행동이 아랍권 이슬람은 물론 동남아 이슬람의 급진주의도 자극해 ‘반미 테러’의 불꽃을 점화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강경 태도가 동남아 이슬람을 더 급진화시키고 있다’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또다시 ‘전쟁 불사’를 외치며 칼을 빼들었다.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그래서 패자만 있고 승자는 없는 기나긴 전쟁의 먹구름이 동남아 하늘을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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