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북한 상상 뛰어넘는 프로젝트 띄웠다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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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은 현대와 북한이 2000년 5월2일 대북 사업을 사실상 합의했고, 현대가 엄청난 규모의 ‘13대 대북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음을 최초로 확인했다.
현대가 추진하는 ‘13대 대북 프로젝트’


·금강산 관광(확대 개발)

·개성·통천 지역에 공단 건설 및 운영

·경의선·경원선·금강산선·동해북부선 등 남북 철도 연결 및 운영

·시내외 및 국제 전화와 관련한 유·무선 통신, 인터넷 통신 등 각종 통신 사업

·발전 시설 건설 등 전력 공급 사업

·관광객 및 물자 수송을 위한 통천비행장 건설 및 운영

·백두산·묘향산·칠보산 등 주요 명승지 종합 개발

·금강산 저수지 및 주변 하천의 수자원 이용 사업

·임진강 유역 댐 건설 및 운영

·고선박 해체 및 재활용 공장 건설 및 운영

·연간 7백20만장 생산 규모의 기와 공장 건설 운영

·3만평 규모의 금강산 영농장 운영

·남북 체육 교류를 위한 평양체육관 건설






2억 달러+α는 과연 현대가 어떤 명목으로 북한에 제공한 것일까. 현재까지 대다수 언론은 남북 정상회담 성사 용도였다는 점을 부각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와 현대상선은 대북 사업에 대한 대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과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는 독점권 인정의 계약권료 혹은 7대 프로젝트에 대한 대가라고 주장했고, 감사원도 현대상선이 사업 용도로 썼음을 확인하는 자료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돈과 정상회담을 연결해서 보는 세간의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우선 돈을 준 시점과 정상회담이 열린 시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은 2000년 6월13~15일에 있었고, 돈은 7~12일에 북한에 건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가 북한과 합의한 시점이 정부와 현대측 주장을 무력하게 만든다. 현대가 북한과‘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맺은 때는 2000년 8월22일. 상식적으로 정상회담 용도가 아니라면 합의도 하기 전인 6월에 돈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시사저널>은 현대의 대북 사업 추진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몇몇 정보통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증언을 들었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현대와 북한이 최종 합의해 서명한 시점은 8월22일이 맞지만, 사실상 타결에 이른 때는 그 해 5월2일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난 2월7일 사실 확인을 요구하자 현대상선 김윤규 사장은 “8월 합의서와 거의 같은 초안이 5월 초에 문서로 만들어졌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6월에 돈이 간 것을 곧바로 정상회담과 연계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남북 당국 요구로 5월 합의 공개 안해”


이제야 5월 합의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김사장 표현을 빌리면 당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이다. 여러 가지 이유란 무엇일까. 김사장은 ‘남한 정부에 미처 알리지 못한 상태에서 합의한 사업이 있어서’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북한측의 요청이 가장 컸다”라고 귀띔했다. 북·일 수교 배상금을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쓰려던 북한은 현대에 30년 독점권을 준 내용이 알려지면 일본 기업들을 자극할 수 있는 데다가 일본과의 수교에도 악영향을 미치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남한 당국도 의견 조율 과정에서 일부라도 합의 사실을 공개하려는 현대를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5월께는 무엇보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간 채널이 적극 가동되고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측면 지원을 한 직후였다. 김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에 뒤이어 4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동 특수를 능가하는 북한 특수’발언을 했다. 북에 적극적인 협력과 화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마디로 당시 정부는 현대와 북한의 극적 합의 사실이 알려져 역사적인 정상회담의 빛이 바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또 남북 간의 교류 협력을 승인하는 부처인 통일부가 합의 내용을 보고받은 후 방대한 사업 규모와 현대에 부여한 30년 독점권 등을 들어 부담스러워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결국 현대는 남북 당국의 요청에 의해 5월 합의 사실을 공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가 대북 사업에 뛰어든 것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했던 1989년 1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정명예회장은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의정서’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1998년 6월 정명예회장이 이른바 소떼몰이 방북에 나서기까지 남북 경협 사업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9년여의 교착 상태를 뚫은 소떼몰이 방북은 11월 현대의 금강호를 금강산으로 띄우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남북 경협 시대가 활짝 열릴 듯했다. 하지만 1999년 말까지는 금강산 뱃길 관광 외에 어떤 사업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현대가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확대 개발하며 서해공단(현 개성공단), 철도·전력·통신 등 사회 기반 시설 등을 놓고 본격 줄다리기를 벌이게 된 것은 2000년 들어서였다. 마침내 5월 초 양측은 잠정 합의에 이를 만큼 급진전된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현대는 왜 합의서 서명을 8월까지 끌어야만 했을까. 5월 합의서에 서명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한 현대 관계자는 “워낙 큰 사업들이어서 현대 처지에서는 파트너인 조선아태평화위원회 이상의 확약이 필요했다”라고 설명했다. 김사장이 인터뷰에서 밝힌 김정일 위원장과 내각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8월 합의서에는 어떤 내용이 있기에 합의서를 본 사람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일까.


정몽헌 회장과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 8월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총괄 합의서와 7개 분야의 세부 약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와 감사원이 언급해 화제가 된 ‘7대 프로젝트’는 이 7개 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측은 7대 프로젝트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7개 분야는 △남북 철도 연결 사업 △통신 △전력 △통천 비행장 △금강산 저수지 물 이용 △관광 명승지 종합 개발사업 △임진강댐 건설 사업이다. 아태평화위가 (송금은) 현대와 아태위 간의 정상 거래이며 정상회담과의 연계는 불순한 모략이라고 주장하며 이례적으로 밝힌 7대 사업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아태평화위는 △금강산 관광 및 동 사업을 원산 이남까지로 확대 △칠보산·백두산 관광 △철도·전력·통신망 구축 △첨단 전자공업 기지 건설 △개성공단 조성 △임진강댐 건설 △구형 선박 해체 사업을 거론했다.





재계 “독점 사업권, 10억 달러 줘도 아깝지 않다”


주목할 것은 현대아산이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 답사에 앞서 정몽헌 회장의 연설을 위해 만든 자료이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이 자료에 따르면 현대의 대북 사업 규모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정상회담을 전후해 일각에서 제기했던 ‘북한판 마셜플랜’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현대의 대북 프로젝트는 북한 전역을 개발하려 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이 자료가 지목하는 큰 사업만도 13개에 이른다(25쪽 ‘프로젝트’ 참조). 이 사업들은 현대가 추진하려는 대북 사업을 총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합의서에서 주목할 대목은 앞서 밝혔듯이 북측의 사회간접자본 및 기간 산업 시설들에 대한 30년 간의 사업권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은 토지 이용권 확보 기간이 50년이기 때문에 독점권 부여 기간도 50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의서에는 ‘현대, 남측, 제3국 기금 또는 특정 기금, 국제기구 자금 지원을 받아 시행되는 모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개발, 건설, 설계, 관리 운영과 무역 등 모든 사업권을 현대에게만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현대는 어떤 나라나 어떤 성격의 돈이 북한에 들어가도 독점 사업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또 현대는 국내외 기업들이 사업에 참여할 때 ‘창구’ 역할을 맡게 된다. 이 합의서대로라면 현대를 통하지 않고는 대북 사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엄청난 독점 사업권을 부여받은 대가라면 현대가 적어도 2억 달러 많게는 5억~10억 달러를 지불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억 달러+α가 정상회담과 전혀 상관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는 북한과 이 엄청난 비즈니스를 협의하면서 확실히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국간 채널을 반드시 열어야 했고, 실제로 정상회담 성사에 상당한 막후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상회담 성사 확인 후 돈 보내려 했을 것”


정상회담이 임박해 현대가 돈을 보낸 것에 대해서는 두가지 시각이 있다. 대북 사업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가 정상회담이 성사된 사실을 확인한 후 돈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어차피 줄 돈이지만, 현대는 정상회담 성사를 사업 보장을 담보하는 끝내기 수순이라고 판단했으리라는 것이다. 북한은 더욱 현대의 돈과 정상회담을 한 묶음으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 상당수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다.


5월에 현대가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정황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5월부터 실제 상황이 된 현대의 유동성 위기를 든다. 3월14일 이른바 ‘왕자의 난’에서 비롯한 유동성 위기 때문에 현대의 자금 마련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현대가 산업은행 4천억원 대출 같은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북에 자금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단서도 현대 내부에서 제공한 흔적이 짙다. 돈 사정이 어려워질수록 채권단은 대북 사업을 문제 삼았고 이럴수록 현대 내부에서는 정부가 금강산 유람선에 카지노 사업 하나 허가해주지 않는다는 따위의 불만을 터뜨렸다. 대북 사업의 핵심 채널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현대상선 김충식 전 사장이 “그 돈은 (정부가 썼지) 우리가 쓰지 않았다”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2000년 6월 현대가 북한에 보낸 돈은 대북 사업 대가로 보는 것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8월 정식 합의에 앞서 그와 다름없는 합의가 5월에 이루어졌고 30년간 독점 사업권을 얻어낸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돈 없이 대북 사업 없다’는 얘기는 대북 비즈니스 세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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